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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이 진심으로 엮을 때 (뜨개질, 진짜 모성, 반복의 힘)

by viewpointlife 2026. 3. 27.

그들이 진심으로 엮을 때 포스터
영화 '그들이 진심으로 엮을 때'

지난주 금요일 밤, 회사에서 부당한 업무 지시를 받고 집에 돌아온 저는 평소처럼 앞치마를 두르고 주방으로 향했습니다. 도마 위에서 파를 써는 동안 머릿속을 맴돌던 분노가 조금씩 가라앉는 것을 느꼈습니다. 그리고 그날 밤 우연히 본 영화 <그들이 진심으로 엮을 때>에서 저와 똑같은 방식으로 세상의 폭력을 견디는 한 사람을 만났습니다. 바로 트랜스젠더 여성 '린코'였습니다. 혈연으로 맺어지지 않은 조카 토모를 따뜻하게 품어주면서도, 세상의 혐오와 편견을 뜨개질이라는 고요한 의식(儀式)으로 소화해 내는 그녀의 모습은 40대 가장으로서 제가 일상을 견디는 방식과 너무나 닮아있었습니다.

린코의 뜨개질, 번뇌를 엮는 108가지 방법

린코가 세상의 무례함과 혐오에 맞서는 방식은 결코 분노로 대응하거나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는 것이 아닙니다. 대신 그녀는 조용히 방 한편에 앉아 털실을 엮습니다. 영화에서 린코는 108개의 뜨개질 코를 만드는 '번뇌 의식'을 반복합니다. 여기서 108이란 불교에서 인간이 겪는 모든 괴로움을 상징하는 숫자로, 제야의 종을 108번 치는 전통에서도 사용되는 의미 깊은 수입니다(출처: 문화재청). 린코는 한 땀 한 땀 실을 엮어가며 자신이 밖에서 겪은 차별과 상처를 물리적으로 소화해 냅니다.

제가 주방에서 도마질을 하고 찌개를 끓이는 것도 이와 정확히 같은 맥락입니다. 직장에서 억울한 일을 당했을 때, 저는 그 분노를 집 안으로 끌고 들어오지 않기 위해 의식적으로 요리를 합니다. 파를 일정한 박자로 써는 소리, 냄비에서 보글보글 끓어오르는 찌개 냄새에 집중하다 보면 어느새 제 마음속 날카로웠던 감정들이 사그라듭니다. 린코의 뜨개질과 제 요리는 모두 '분노의 전환 의식'이라는 공통점을 지닙니다. 세상이 우리를 향해 아무리 무례하게 굴어도, 우리는 그 에너지를 파괴가 아닌 창조로 바꾸어냅니다.

2024년 통계청 자료에 따르면 40대 직장인의 번아웃 경험률은 60%를 넘어섰습니다(출처: 통계청). 많은 사람들이 직장과 가정에서 이중 스트레스를 받으며 감정 조절에 어려움을 겪고 있습니다. 하지만 린코처럼, 그리고 저처럼 자신만의 고요한 의식을 통해 번뇌를 소화하는 사람들은 가족에게 화를 옮기지 않고 스스로를 치유할 수 있습니다.

혈연을 넘어선 진짜 모성, 도시락 하나에 담긴 온기

영화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장면은 린코가 토모를 위해 처음으로 도시락을 싸주는 순간입니다. 매일 편의점 삼각김밥으로 끼니를 때우던 토모는 태어나서 처음 보는 예쁜 도시락을 받고 어찌할 바를 모릅니다. 하지만 도시락이 상해버렸고, 토모는 배탈이 납니다. 이 장면에서 린코는 "처음이라서 서둘러 먹지 않았구나. 다음부턴 천천히 먹어도 괜찮아"라고 말합니다. 실수를 나무라는 대신 토모의 마음을 먼저 헤아리는 이 대사 하나에 진짜 모성이 담겨있습니다.

모성(母性, Motherhood)이란 단순히 생물학적으로 아이를 낳는 능력이 아니라, 타인을 무조건적으로 돌보고 보호하려는 정서적 태도를 의미합니다. 린코는 생물학적 여성이 아니지만, 토모에게 진짜 엄마조차 주지 못했던 무조건적 사랑과 안전감을 제공합니다. 반대로 토모의 친엄마는 혈연으로는 엄마이지만, 아이를 방치하고 술에 취해 집에 돌아와도 눈조차 마주치지 않습니다. 이 대비는 "가족이란 무엇인가?"라는 근본적인 질문을 던집니다.

저는 두 딸아이의 아버지로서 이 장면이 특히 가슴에 와닿았습니다. 제가 주방에서 정성껏 요리를 해서 식탁에 올릴 때, 아이들이 "아빠 이거 맛있어!"라고 말하는 순간이야말로 제가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승리를 거둔 것처럼 느껴집니다. 린코가 토모에게 도시락을 싸주며 느꼈을 그 벅찬 감정을 저도 매일 경험합니다. 혈연이 아니라 '매일 함께 밥을 먹고, 서로의 하루를 나누며, 진심으로 시간과 온기를 엮어가는 행위'가 진짜 가족을 만든다는 것을 저는 이 영화를 통해 다시 한번 확인했습니다.

린코의 어머니는 생물학적 남성으로 태어난 딸에게 손수 뜨개질로 가슴 패드를 만들어줍니다. 진짜 가슴은 아닐지라도, 한 땀 한 땀 정성껏 엮어 내려간 그 포근한 가슴에는 "너를 온전히 나의 딸로 받아들인다"는 어머니의 눈부신 사랑이 담겨있습니다. 린코는 자신이 어머니에게 받은 그 무조건적 사랑을 토모에게 그대로 물려줍니다. 이것이 바로 '모성의 세대 간 전이(Intergenerational Transmission of Mothering)'라고 부를 수 있는 현상입니다. 심리학적으로 부모에게 받은 애정 방식은 자녀 양육 방식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친다는 연구 결과가 있습니다(출처: 한국심리학회).

40대 직장인이 세상을 견디는 방법, 정성스러운 반복의 힘

저는 40대 직장인이자 가장으로서 매일 불합리한 세상과 마주합니다. 부당한 업무 지시, 동료의 무례한 말, 상사의 부당한 압박 등 화가 나는 일은 끝도 없이 펼쳐집니다. 20대 때의 저라면 핏대를 세우며 정면으로 맞섰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지금은 다릅니다. 제 어깨에 기대어 사는 아내와 두 딸아이를 생각하면, 밖에서 묻혀온 그 거칠고 날 선 분노를 집 안으로 끌고 들어오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은 일인지 알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저는 린코처럼 나만의 의식을 만들었습니다. 바로 '주말 저녁 요리'입니다. 스트레스가 극에 달한 주말이면 저는 조용히 앞치마를 두르고 주방으로 향합니다. 도마 위에서 일정한 박자로 채소를 썰고, 냄비에 육수를 내어 찌개를 끓입니다. 타닥타닥 파를 써는 소리, 보글보글 끓어오르는 구수한 냄새에 집중하다 보면 어느새 제 마음속 분노가 사르르 녹아내립니다. 린코가 털실을 엮어 자신의 상처를 치유했듯, 저는 도마질을 하고 요리를 하며 제 마음속 화를 다스립니다.

이런 의식의 힘은 과학적으로도 입증되어 있습니다. 반복적이고 리듬감 있는 활동은 뇌의 전두엽 피질을 활성화시켜 감정 조절 능력을 높이고, 스트레스 호르몬인 코르티솔(Cortisol) 수치를 낮춘다는 연구 결과가 있습니다. 여기서 코르티솔이란 스트레스 상황에서 분비되는 호르몬으로, 장기간 높은 수치로 유지되면 우울증과 불안장애를 유발할 수 있습니다(출처: 대한신경정신의학회). 린코의 뜨개질과 제 요리는 모두 이런 반복 활동의 치유 효과를 활용한 것입니다.

영화 후반부, 린코와 마키오, 토모 세 사람이 함께 108개의 뜨개질 코를 만드는 장면은 이 영화의 백미입니다. 린코 혼자서 감내해야 했던 번뇌를, 이제는 토모와 마키오가 기꺼이 함께 나누어 짊어집니다. 제가 주방에서 요리를 할 때 두 딸아이가 옆에서 양파 껍질을 까고 설거지를 돕는 순간이 바로 이런 느낌입니다. 세상의 폭력을 혼자 견디는 것이 아니라, 가족이 함께 나누어 소화해 내는 것. 그것이 바로 진짜 가족의 의미라는 것을 저는 린코를 통해 배웠습니다.

린코가 토모에게 남긴 가장 큰 선물은 비싼 장난감이나 돈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세상이 아무리 무례하게 굴어도, 고요하고 정성스러운 일상의 반복으로 우리는 충분히 견딜 수 있다"는 삶의 태도였습니다. 토모는 영화 마지막에 엄마에게 돌아가면서도, 린코에게 받았던 낡은 손수건을 린코의 집에 두고 갑니다. 손수건은 토모가 가장 외롭고 상처받았던 시절 스스로를 달래던 애착물이었습니다. 그것을 린코에게 남긴다는 것은 "이제 저는 혼자서도 괜찮습니다. 당신이 제게 준 사랑 덕분에요"라는 무언의 인사였습니다.

저는 이 영화를 보고 나서 제 요리 습관을 아이들에게 설명해 주었습니다. "아빠가 주방에서 요리를 하는 건 단순히 밥을 만들기 위해서가 아니야. 밖에서 받은 스트레스를 정리하고, 우리 가족을 위한 따뜻한 에너지로 바꾸는 시간이란다." 큰딸이 "그럼 나도 화나면 요리해 볼래"라고 대답했을 때, 저는 린코가 토모에게 뜨개질을 가르쳐주던 그 장면을 떠올렸습니다. 세대를 건너 전해지는 이 아름다운 치유의 방식이 제 딸들에게도 이어지길 바랍니다.

편견과 불합리로 가득한 세상 속에서, 묵묵히 내 가족의 밥을 짓고 마음의 실을 엮는 이 정성스럽고 무해한 반복이야말로 제가 40대 어른으로서 세상을 이겨내는 가장 단단하고 우아한 방식입니다. <그들이 진심으로 엮을 때>는 혈연이 아닌 진심으로 맺어진 가족의 아름다움을, 그리고 세상의 폭력을 고요한 일상으로 견디는 어른들의 숭고함을 보여주는 걸작입니다. 밖에서의 스트레스를 나도 모르게 가족에게 날 선 말로 쏟아내고 후회해 본 모든 어른들에게, 그리고 "나만의 뜨개질"이 필요한 분들에게 이 영화를 강력히 권합니다.


참고: https://www.youtube.com/watch?v=ung4r1-Wif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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