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물건을 버리는 것이 과거를 버리는 것과 같다면, 우리는 왜 그토록 버리지 못하고 살까요. 저는 40대 중반에 서재를 정리하다가 그 질문 앞에서 한참을 멈춰 섰습니다. 손에 쥔 낡은 다이어리 한 권이 갑자기 10킬로그램짜리 돌덩이처럼 느껴지던 그 순간, 영화 한 편이 떠올랐습니다.
영화가 보여주는 집착의 민낯
2010년 개봉한 영화 '에브리씽 머스트 고'는 중년 남성의 실패담을 꽤 불편할 정도로 정직하게 그려냅니다. 16년간 헌신한 회사에서 해고당한 날, 집에 돌아온 주인공 닉을 반기는 것은 굳게 잠긴 현관문과 잔디밭에 낱낱이 펼쳐진 자신의 살림살이였습니다. 안락의자, 턴테이블, 골프채, 낡은 잡지더미. 아내는 닉이 집에 없는 사이 계좌를 동결하고 집을 나가버렸고, 닉은 결국 그 잔디밭에서 먹고 자는 처지가 됩니다.
이 장면이 불편하면서도 묘하게 공감되는 이유가 있습니다. 미국 중산층의 상징인 단정한 잔디밭이, 한 사람의 사생활이 통째로 까발려지는 가장 수치스러운 무대로 돌변하는 순간이기 때문입니다. 직장이라는 울타리, 명함이라는 갑옷이 사라지면 누구든 그 잔디밭의 닉처럼 발가벗겨진 기분을 경험하게 됩니다. 저도 비슷한 감각을 느낀 적이 있습니다. 직함이 아무 의미 없는 자리에서 오랫동안 쌓아온 '성과의 증거물'들을 마주했을 때, 그것이 나를 지켜주는 갑옷인지, 아니면 나를 옭아매는 쇠사슬인지 구분이 되지 않았습니다.
심리학에서는 이 상태를 '카타르시스(Catharsis) 결핍'이라고 설명하기도 합니다. 카타르시스란 억눌렸던 감정이나 집착이 해소되면서 심리적 정화가 일어나는 과정을 뜻합니다. 닉이 잔디밭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은 단순히 갈 곳이 없어서가 아니라, 이 정화의 과정을 회피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집착과 관계의 역학
영화의 절묘한 지점은 닉이 물건을 팔기 시작하면서부터 사람들이 그의 삶 속으로 들어온다는 것입니다. 할 일도 없고 갈 곳도 없는 옆집 소년 켄, 만삭의 몸으로 혼자 이사 온 이웃 사만다. 이들은 거창한 위로나 해결책을 가져오지 않습니다. 그저 마당 앞에 나란히 앉아 이야기를 나눌 뿐입니다. 그런데 그것으로 충분했습니다.
저는 이 대목에서 '에브리씽 머스트 고(Everything Must Go)'라는 제목이 비로소 제대로 들렸습니다. '모든 것을 팔아야 한다'는 말은 동시에 '모든 것을 내려놓아야 한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집착 심리학에서 '대상 집착(Object Attachment)'이라는 개념이 있습니다. 이는 물건에 자신의 정체성이나 과거 감정을 투영하여 분리하지 못하는 심리적 상태를 가리킵니다. 닉의 잔디밭에 쌓인 물건들은 단순한 살림살이가 아니라, 그가 놓지 못하는 전성기의 기억과 자부심 그 자체였던 것입니다.
제 서재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젊은 시절 치열하게 받아낸 각종 사령장과 상패들, 맞춰 놓고 이제는 배가 나와 입지 못하는 정장, 언젠간 다시 볼 것이라며 쌓아둔 수백 권의 낡은 전공 서적과 업무 다이어리들. 아내가 수차례 버리자고 했지만 저는 번번이 고집을 부렸습니다. 그것들을 버리면 20대와 30대의 자부심마저 쓰레기통에 버려지는 것 같아 두려웠기 때문입니다. 솔직히 이건 예상 밖의 감정이었습니다. 물건을 버리는 일이 이렇게 두려운 일인 줄은 몰랐으니까요.
흥미롭게도 연구에 따르면 물건에 대한 과도한 집착은 스트레스 호르몬인 코르티솔(Cortisol) 수치를 높이는 것과 연관됩니다. 코르티솔이란 신체가 스트레스를 받을 때 분비되는 호르몬으로, 만성적으로 높은 수준이 유지되면 불안과 우울로 이어질 수 있습니다. 어수선한 공간이 단순히 보기 불편한 문제가 아니라 심리적 피로와 직결된다는 의미입니다(출처: 미국심리학회(APA)).
닉이 물건을 처분할수록 얼굴에 번지던 그 묘한 해방감과 씁쓸함의 혼재. 그 표정을 본 날 밤, 저는 커다란 봉투 두 개를 들고 서재로 들어갔습니다.
마음을 비우는 것은 약함이 아니다
마음을 비우는 방법에 대해 '명상을 하라', '물건을 정리하라'는 조언은 많습니다. 그런데 막상 해보면 방법을 몰라서 못하는 것이 아님을 금방 깨닫습니다. 하기 싫어서, 혹은 두려워서 안 하는 것에 가깝습니다. 제 경험상 이건 좀 다릅니다. 방법을 아는 것과 실행하는 것 사이에는 상당한 거리가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순서를 바꿔보는 것이 도움이 된다고 생각합니다. 마음을 먼저 비우려고 애쓰기보다, 물리적 공간부터 비우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집착에서 벗어나 마음을 정리하고 싶다면, 실제로 시도해 볼 수 있는 순서는 다음과 같습니다.
- 먼저 1주일을 '해독 주간'으로 정해 쇼핑과 소셜미디어를 의도적으로 멀리합니다. 충동구매 욕구가 올라오면 '해독 주간이 끝난 후에 결정한다'라고 스스로에게 약속합니다.
- 물건을 정리합니다. 도저히 버리지 못하겠는 물건은 박스에 담아 한 켠에 치워두는 것만으로도 충분합니다. 물건과 잠시 거리를 두는 것이 목표입니다.
- 감정 일지를 씁니다. 힘들었던 일과 좋았던 일을 구체적으로 씁니다. 글쓰기가 부담스럽다면 핸드폰 음성 녹음으로 대신해도 됩니다. 저는 이 방식을 직접 써봤는데, 쓰는 것보다 말하는 편이 훨씬 솔직하게 감정이 나왔습니다.
- 마지막으로 마음챙김 명상(Mindfulness Meditation)을 시도합니다. 마음챙김 명상이란 판단 없이 현재 순간에 의식을 집중하는 훈련으로, 감정의 소용돌이에서 한 발 물러서는 능력을 기르는 데 효과적입니다.
'마음 챙김(Mindfulness)'의 효과는 이미 여러 연구를 통해 검증된 바 있습니다. 집착과 반추적 사고를 줄이고 심리적 유연성을 높이는 데 유의미한 효과가 있다는 것이 학계의 공통된 결론입니다(출처: 국립정신건강센터).
제가 직접 서재를 비우던 날, 빛바랜 상패와 낡은 다이어리들을 봉투에 쑤셔 넣으면서 가슴 한구석이 뻐근해졌습니다. 그런데 동시에 알 수 없는 홀가분함도 밀려왔습니다. 그리고 그 텅 빈 공간에서 비로소 보이기 시작한 것이 있었습니다. 제가 과거의 영광에 집착하느라 정작 좁아진 집 안에서 불편하게 부대끼고 있던 아내와 두 딸아이의 공간이었습니다.
닉이 마당을 비워낸 뒤에야 켄이와 사만다를 볼 수 있었듯, 저도 서재를 비운 뒤에야 가족들이 필요로 하는 공간을 볼 수 있었습니다.
영화 '에브리씽 머스트 고'는 극적인 기적이나 과장된 반전을 약속하지 않습니다. 잔디밭의 남자가 자신의 짐들을 하나씩 처분하는 과정을 극도로 건조하게, 그러나 따뜻하게 담아낼 뿐입니다. 그게 오히려 더 오래 마음에 남습니다. '손에 쥔 것을 완전히 놓아야만 새로운 문손잡이를 잡을 수 있다'는 말이 공허하게 느껴졌던 분이라면, 이 영화를 한 번 보시기를 권합니다. 엔딩 크레딧이 올라갈 때쯤이면, 아마 오래 묵혀둔 옷장 문을 열고 싶어질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