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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기장 아부 라에드 리뷰 (거짓말, 희생, 요르단)

by viewpointlife 2026. 5. 7.

기장 아부 라에드 포스터
영화 '기장 아부 라에드'

요르단 영화 역사에서 장편 극영화가 끊긴 공백기는 무려 50년이었습니다. 그 50년을 깨고 2007년 세상에 나온 작품이 바로 <기장 아부 라에드>입니다. 처음 이 수치를 접했을 때 저는 솔직히 반신반의했습니다. 50년이라는 단절이 오히려 이 영화의 투박함과 진정성을 가능하게 만든 것은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지금도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습니다.

거짓말이 씨앗이 되는 순간

일반적으로 거짓말은 신뢰를 무너뜨린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하지만 제 경험상 이건 좀 다릅니다. 암만 공항에서 청소부로 일하는 아부 라에드가 버려진 기장 모자를 우연히 주워 쓰고 동네에 나타났을 때, 빈민가 아이들은 그를 진짜 파일럿으로 믿어버립니다. 그는 부정할 기회가 있었지만 입을 다뭅니다. 대신 에펠탑과 뉴욕 마천루, 드넓은 바다 이야기를 풀어놓습니다.

여기서 서사 기법 중 '신뢰할 수 없는 화자(Unreliable Narrator)'라는 개념을 떠올리게 됩니다. 신뢰할 수 없는 화자란 독자 혹은 관객에게 객관적 사실이 아닌 주관적·왜곡된 정보를 전달하는 이야기꾼을 가리킵니다. 그런데 아부 라에드는 교묘하게 다릅니다. 그는 자신이 거짓말쟁이임을 알면서도, 그 이야기를 듣는 아이들을 위해 기꺼이 '의도된 허구'를 선택합니다.

저도 비슷한 선택을 한 적이 있습니다. 거래처에서 억지스러운 갑질을 당하고 속으로 핏물을 삼키며 퇴근하던 날, 도어록 비밀번호를 누르기 전 현관문 앞에서 잠시 멈춰 섰습니다. 양 뺨을 두 번 세게 두드리고, 입꼬리를 억지로 끌어올렸습니다. 문이 열리자마자 두 딸아이가 강아지처럼 달려왔고, 저는 그날 회사에서 얼마나 중요한 프로젝트를 이끌고 있는지를 신나게 과장해서 떠들었습니다. 아이들의 눈동자에 별빛 같은 것이 반짝이는 걸 보면서, 저는 그 거짓말이 나쁜 것이라고 도무지 느껴지지 않았습니다.

아부 라에드의 거짓말이 위험한 기만이 아닌 이유는, 그것이 오로지 상대를 위한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이 지점이 영화가 단순한 감동 서사에 머물지 않고 윤리적 질문까지 던지는 순간입니다.

희생이라는 단어의 무게

아부 라에드라는 인물을 단순히 '착한 청소부'로만 읽으면 영화의 절반을 놓치는 셈입니다. 그가 진짜 비범한 이유는 후반부에 드러납니다. 가정 폭력에 시달리는 소년 무라드를 구하기 위해 그는 자신의 안위를 완전히 내려놓고 행동합니다.

여기서 영화 비평 용어인 '카타르시스(Catharsis)'가 떠오릅니다. 카타르시스란 관객이 극적 긴장과 감정의 폭발을 경험하며 내면의 억눌린 감정을 정화하는 현상을 뜻합니다. 아리스토텔레스가 비극의 핵심 기능으로 꼽은 이 개념이, 투박한 암만의 골목길을 배경으로 이토록 선명하게 작동할 줄은 예상하지 못했습니다. 저는 영화를 보는 내내 제가 마흔이 넘어서 겪어온 자존심이 구겨지던 순간들을 무의식 중에 겹쳐 보고 있었습니다.

아부 라에드의 희생이 갖는 힘은, 그것이 결코 영웅적 제스처가 아니라는 데 있습니다. 그는 화려하지 않습니다. 세련된 대사도, 극적인 배경 음악도 없이, 그냥 그 자리에 섭니다. 이 영화가 가진 미장센(Mise-en-scène), 즉 화면 안에 배치되는 모든 시각적 요소의 총체가 일관되게 '결핍'을 선택하고 있다는 점이 오히려 인물의 무게를 더 크게 만듭니다.

영화가 보여주는 아부 라에드의 희생이 설득력 있는 이유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 이미 삶에서 아들을 잃은 트라우마를 가진 인물이 그럼에도 타인의 아이에게 다시 마음을 여는 과정을 보여줍니다.
  • 폭력적인 이웃 아버지를 경찰에 신고하고, 그것이 역효과를 낳자 더 직접적인 방식으로 개입합니다.
  • 자신의 낮은 사회적 지위를 이유로 물러서지 않습니다.

일반적으로 영화 속 구원자는 강자이거나 특별한 능력을 가진 존재로 묘사된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하지만 이 영화에서는 반대입니다. 제 경험상, 현실에서 진짜 버팀목이 되어주는 사람들도 대개 그런 평범하고 지친 어른들이었습니다.

요르단 사회와 이 영화의 맥락

<기장 아부 라에드>는 요르단이라는 배경을 떼어놓고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요르단은 1948년 이후 팔레스타인 난민 문제, 반복된 중동 분쟁, 만성적인 경제 침체를 안고 있는 나라입니다. 실제로 요르단 전체 인구 중 난민 비율은 세계 최고 수준으로 꼽히며, 2023년 기준 유엔난민기구(UNHCR)에 등록된 난민 수만 약 75만 명에 달합니다(출처: 유엔난민기구 UNHCR).

이런 사회 구조 속에서 영화가 그려내는 빈부격차와 가정 폭력은 단순한 극적 장치가 아닙니다. 실제 암만 외곽 빈민가의 일상이 그대로 스크린 위에 올라온 것입니다. 영화 속 계층 갈등을 분석할 때 쓰이는 개념인 '사회적 재생산(Social Reproduction)'이라는 틀이 유용합니다. 사회적 재생산이란 빈곤, 폭력, 교육 결핍이 부모 세대에서 자녀 세대로 고스란히 전달되는 구조를 가리킵니다. 아부 라에드가 아이들에게 세상 이야기를 들려주는 행위는, 바로 이 사슬을 끊으려는 몸짓으로 읽힙니다.

영화를 향한 일부 평론가의 비판도 있습니다. 서사의 느슨함이나 감정 표현의 과잉을 지적하는 시각이 그것입니다. 저는 그 비판을 완전히 틀렸다고 말하기는 어렵습니다. 다만 제가 직접 이 영화를 보면서 느낀 것은, 그 느슨함이 오히려 다큐멘터리처럼 현장을 걷는 느낌을 주었다는 점입니다. 세련된 할리우드의 3막 구조(Three-Act Structure), 즉 설정-대립-해결로 깔끔하게 마무리되는 서사 형식 대신, 이 영화는 삶이 원래 그러하듯 해결되지 않은 채 끝납니다.

아랍권 영화의 국제 배급 현황을 연구한 자료에 따르면, 중동 지역 독립 영화의 해외 노출 기회는 유럽이나 북미 대비 현저히 낮은 수준입니다(출처: 국제영화제작자연맹 FIAPF). 그런 구조적 한계 안에서 <기장 아부 라에드>가 국제 영화제에서 주목받은 것은, 기교가 아닌 진정성이 만들어낸 결과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이 영화는 매일 전쟁 같은 하루를 버텨내고 귀가하는 사람들에게 특별히 깊이 닿는 작품입니다. 아부 라에드의 굽은 등과 엉성한 기장 모자는, 밖에서 묻혀온 흙먼지를 숨긴 채 집안에서 가장 환한 표정을 지어 보이는 세상 모든 어른의 뒷모습과 겹칩니다. 저는 영화를 본 뒤 퇴근길 현관문 앞에서 심호흡을 하던 그 순간들이 부끄럽지 않게 되었습니다. 그것이 어쩌면 이 영화가 남긴 가장 조용하고 단단한 선물이었습니다. 기회가 있다면 꼭 한 번 보시길 권합니다. 보고 나서 오늘 저녁 현관문을 여는 손이 달라질 수도 있습니다.


참고: https://www.youtube.com/watch?v=bdjWTZXwUm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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