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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윈터 패싱 리뷰 (부모 이해, 가족 화해, 감정 억압)

by viewpointlife 2026. 5. 10.

윈터 패싱 포스터
영화 '윈터 패싱'

부모님이 차갑고 무심했다고 느끼는 분, 혹시 그 냉기가 사랑이 없어서가 아니라 표현하는 방법을 끝내 배우지 못한 탓이었다면 어떻겠습니까. 저는 40대가 되어서야 그 사실을 알았습니다. 그것도 아버지의 낡은 서랍 하나를 열었다가, 생각지도 못한 방식으로.

서랍 속에 박제된 사랑 — 감정 억압과 부모 이해

영화 윈터 패싱(Winter Passing)은 뉴욕에서 무명 배우로 떠돌던 리즈가, 출판사의 제안을 계기로 오랫동안 등진 아버지 돈 홀딘의 집으로 돌아오는 이야기입니다. 리즈의 목적은 단순했습니다. 돌아가신 어머니와 아버지가 젊은 날 주고받았던 연애편지를 팔아 돈을 챙기는 것. 그러나 막상 고향 집에서 마주한 것은, 기억 속 차갑고 권위적인 아버지가 아니라 차고 속에 틀어박혀 생을 겨우 이어가는 늙고 쇠약한 노인이었습니다.

심리학에서는 이처럼 감정 표현 능력 자체가 결여된 상태를 감정표현불능증(alexithymia)이라 부릅니다. 여기서 alexithymia란 내면의 감정을 인식하거나 언어로 표현하는 능력이 현저히 부족한 상태를 가리키는 임상 개념으로, 회피형 애착(avoidant attachment) 패턴과 깊은 관련이 있습니다. 회피형 애착이란 어린 시절 감정적 돌봄을 충분히 받지 못한 사람이 성인이 된 후에도 친밀한 관계에서 감정을 닫아버리는 방어 기제를 말합니다. 국내 연구에 따르면 50대 이상 남성의 경우 감정표현불능증 성향이 타 연령·성별 집단에 비해 유의미하게 높게 나타났습니다(출처: 한국심리학회).

저의 아버지가 딱 그랬습니다. 평생 다정한 말 한마디 없이 무뚝뚝하게 일만 하신 분. 저는 두 딸아이에게 '다정한 아빠'가 되겠다고 다짐하면서, 속으로는 '나는 절대 저렇게 차갑고 재미없는 아빠는 되지 않겠다'라고 아버지를 지웠습니다. 그러던 어느 명절, 아버지 서재 컴퓨터를 고쳐드리려 오래된 책상 서랍을 열었다가 손이 멈췄습니다. 먼지 쌓인 서류 봉투 안에는 제가 초등학교 때 받은 상장, 삐뚤빼뚤하게 꾹꾹 눌러쓴 어버이날 편지, 심지어 첫 아르바이트비로 사드렸던 구멍 난 양말 한 짝까지 고스란히 담겨 있었습니다.

직접 겪어보니, 그 순간 눈물이 나거나 감동적인 음악이 흐른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냥 오래된 먼지 냄새만 코를 찔렀습니다. 그런데 그 냄새가 뭔가를 무너뜨렸습니다. 아버지는 사랑이 없었던 것이 아니라, 그 사랑을 꺼내는 방법을 평생 몰랐던 것입니다.

이 영화가 말하는 핵심은 바로 이 지점입니다. 부모 세대가 자녀에게 남긴 정서적 결핍(emotional deprivation)의 문제를 단순히 나쁜 부모 탓으로 환원하지 않습니다. 여기서 정서적 결핍이란 양육 과정에서 충분한 감정적 돌봄과 공감을 받지 못해 자녀의 심리 발달에 지속적인 영향을 미치는 상태를 뜻합니다. 영화는 그 결핍의 이면에 놓인 부모 자신의 상실감과 무력감까지 함께 비춥니다.

혈연보다 깊은 것 — 가족 화해와 겨울을 통과하는 법

영화에서 제가 가장 인상 깊었던 설정은 돈 홀딘의 집에 함께 사는 두 인물, 코빗과 셸리였습니다. 핏줄로 묶인 딸 리즈는 아버지 곁에서 겉돌지만,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이 두 사람은 노인의 괴팍한 일상을 아무 조건 없이 껴안습니다. 셸리는 자궁내막증(endometriosis)으로 오랜 투병 끝에 자궁적출술을 받은 이력이 있습니다. 자궁내막증이란 자궁 내막 조직이 자궁 밖에서 증식하며 만성 통증과 불임을 유발하는 질환으로, 치료가 까다롭고 재발이 잦아 환자의 정신건강에 큰 부담을 줍니다. 그 상처를 안고 있는 셸리가 오히려 더 큰 상처를 가진 노인 옆에 조용히 앉아 밥을 차려주는 장면은, 말 한마디 없이도 깊은 울림을 줬습니다.

가족 치료(family therapy) 분야에서는 이처럼 혈연이 아닌 선택적 연대로 형성된 관계를 '선택 가족(chosen family)'이라는 개념으로 설명합니다. 선택 가족이란 혈연이나 법적 관계가 아닌 공감과 돌봄을 기반으로 형성된 친밀한 공동체를 의미합니다. 실제로 가족 기능이 약화된 현대 사회에서 선택 가족의 심리적 지지 효과는 전통적 가족 구조와 유사하거나 더 높게 나타난다는 연구 결과도 있습니다(출처: 한국가족치료학회).

저는 이 영화를 보면서, 아버지의 서랍에서 그 낡은 양말을 발견했던 날 제가 거실로 나가 처음으로 아버지의 굽은 어깨를 말없이 주물러 드렸던 기억을 떠올렸습니다. 그때 아버지는 아무 말씀도 안 하셨습니다. 그냥 텔레비전을 보면서 어깨를 가만히 내주셨습니다. 그게 전부였지만, 그것으로 충분했습니다.

영화 속 리즈가 아버지와 나눈 화해도 그런 방식이었습니다. 거창한 사과도, 쏟아지는 눈물도 없었습니다. 부모님의 편지를 불태우고, 아버지의 미완성 원고를 조용히 읽어주며, 피아노 소리를 같이 듣는 것. 그 작고 조용한 행위들이 오랫동안 얼어 있던 관계를 조금씩 녹였습니다.

이 영화가 보여주는 '겨울을 통과하는 방법'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 과거의 상처를 억지로 도려내려 하지 말고, 그 추위를 온몸으로 겪어낼 것
  • 표현하지 못하는 사람의 이면에 무엇이 있었는지 들여다볼 것
  • 화해는 극적인 고백이 아니라, 같은 공간에서 조용히 숨 쉬는 것으로도 시작될 수 있다는 것

그리고 코미디 배우 윌 페렐이 연기한 코빗은 이 영화 전체를 관통하는 온기를 담당합니다. 제가 직접 보기 전까지는 그가 이런 역할을 소화할 수 있으리라 상상도 못 했습니다. 서툴게 기타를 잡고, 어설프게 오픈 마이크 무대에 서는 그 모습이, 말보다 존재 자체로 옆에 있어주는 것이 때로 가장 큰 위로임을 증명합니다.

부모님과 마음의 문을 닫은 채 오랫동안 거리를 두고 살아온 분이라면, 이 영화가 그 거리를 좁히는 조용한 계기가 될 수 있습니다. 제 경험상 이런 종류의 영화는 눈물샘을 자극하는 방식이 아니라, 한참 지나 혼자 밥을 먹다가 갑자기 뭔가가 올라오는 방식으로 작동합니다. 억지로 부정해 온 나의 차갑고 긴 겨울을 마침내 통과하고, 스스로에게 따뜻한 봄을 허락하는 것. 그게 이 영화가 조용히 건네는 제안입니다.


참고: https://www.youtube.com/watch?v=NAnfmP9J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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