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가 그린 그림일기 한 장이 저를 무너뜨린 적이 있습니다. 화려한 집도, 비싼 장난감도 아닌 '아빠가 나를 보며 웃어주었던 날'이라는 짧은 문구 하나였습니다. 가브리엘 무치노 감독의 는 바로 그 그림일기와 같은 영화입니다. 눈에 보이지 않아도 끝까지 자리를 지킨 사랑이 결국 한 사람의 삶을 어떻게 구원하는지를, 이 영화는 꽤 오래 가슴에 남는 방식으로 보여줍니다.무너지면서도 놓지 않았던 부성애영화는 아내를 교통사고로 잃은 소설가 제이크(러셀 크로우)의 이야기로 시작합니다. 그는 사고 이후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PTSD)에 시달리게 됩니다. 여기서 PTSD란 생명을 위협하는 충격적 사건을 겪은 뒤 반복적인 플래시백과 신경과민, 감정 마비 등이 지속되는 심리적 외상 반응을 말합니다. 제이크는 이 증상으로..
1930년대 스웨덴 정부는 우생학을 명목으로 사미족 아이들의 머리 둘레를 재고 옷을 벗겨 사진을 찍었습니다. 이 사실을 처음 접했을 때 저는 손이 멈췄습니다. 영화 는 그 폭력의 한복판에 선 소녀 한 명의 이야기인데, 보는 내내 화면이 아닌 제 과거가 자꾸 겹쳐 보여서 편하게 앉아 있을 수가 없었습니다.국가가 허락한 차별, 우생학이라는 이름의 폭력영화는 1930년대 스웨덴 북부 라플란드에서 시작합니다. 사미족(Sámi)—스웨덴, 노르웨이, 핀란드, 러시아 북부에 걸쳐 수천 년간 살아온 북유럽 원주민으로, 고유한 언어와 순록 유목 문화를 지켜온 민족입니다—의 소녀 엘레 마리아는 국가가 운영하는 유목기숙학교에 강제 입학합니다. 여기서 '유목기숙학교'란 사미족 아이들을 주류 스웨덴 사회로 편입시키기 위해 설립..
아이가 울면서 들어왔을 때, 저는 그 아이 앞에 마주 앉아 "왜 졌는지"를 분석했습니다. 그게 좋은 아빠의 역할이라고 믿었으니까요. 2015년작 를 보고 나서야, 그 믿음이 얼마나 잔인한 오만이었는지 뼈저리게 깨달았습니다. 93세의 셜록 홈즈가 치매와 싸우며 자신의 마지막 사건을 되짚는 이 영화는, 이성과 논리가 닿지 못하는 인간의 영역에 대한 묵직한 고백입니다.이성의 한계 — 차가운 팩트가 사람을 구하지 못할 때홈즈가 은퇴한 이유를 두고 "명탐정이 해결하지 못한 사건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보는 시각도 있는데, 저는 조금 다르게 읽었습니다. 그는 사건을 해결하지 못한 게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너무 완벽하게 해결해 버렸고, 그것이 문제였습니다.영화 속 앤 켈모트 부인은 두 번의 유산 끝에 깊은 멜랑꼴리아(..
아이에게 필요한 것이 밥과 집이라고 믿던 시절이 저에게도 있었습니다. 1997년작 영화 는 그 착각을 산산조각 냅니다. 알코올 중독 아버지의 폭력과 어머니의 죽음이라는 이중의 비극 속에서도 열한 살 소녀 엘렌은 구원을 기다리는 대신 스스로 짐을 싸서 문을 두드립니다. 캐이 기번스의 자전적 소설이 원작인 이 작품은, '가족'이라는 단어를 핏줄이 아닌 다른 언어로 다시 정의합니다.자기 구원 — 구원자를 기다리지 않은 아이피해자성(victimhood)이라는 개념이 있습니다. 여기서 피해자성이란, 자신이 처한 불행을 외부 탓으로만 귀결하며 수동적으로 머무르는 심리적 상태를 뜻합니다. 엘렌은 이 피해자성의 함정을 본능적으로 거부합니다. 아버지의 주먹을 피해 교사 줄리아의 집에 잠시 몸을 맡기고, 법정에서는 판사에..
2005년 개봉한 는 자넷 오크의 베스트셀러 '프레리 러브' 시리즈 세 번째 작품을 원작으로 한 서부 개척 드라마입니다. 총잡이나 결투 같은 화려한 장면은 단 한 컷도 없습니다. 대신 덜컹거리는 마차, 갈라진 손바닥, 흙먼지 속에서도 끝내 피어나는 삶의 온기가 영화 전체를 채웁니다. 솔직히 처음엔 너무 고요해서 지루할 것 같았는데, 보고 나서 한참을 멍하니 있었습니다.개척 서사 — 고난이 없으면 땅도 없다영화는 미시(에린 코트렐)와 윌리(로건 바솔로뮤) 부부가 마차 행렬에 합류해 서부로 향하는 장면으로 시작합니다. 홈스테딩(Homesteading)이라는 개척 제도, 즉 황야에 정착해 일정 기간 땅을 직접 일구면 소유권을 인정해 주던 19세기 미국의 실제 법적 장치를 배경으로 합니다. 여기서 홈스테딩이란 ..
야수라 불리던 개가 사실은 가장 순수한 존재였다면, 그렇다면 진짜 야수는 누구였을까요. 2013년 프랑스에서 제작된 영화 〈벨과 세바스찬〉을 처음 봤을 때 저는 내내 불편했습니다. 스크린 속 마을 사람들의 모습이 낯설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제가 한때 그 자리에 서 있었다는 걸 알고 있었으니까요.편견이라는 이름의 야수 — 벨과 세바스찬이 드러낸 것영화는 1945년 프랑스 알프스의 작은 마을을 배경으로 시작합니다. 양 떼를 물어 죽인다는 소문이 도는 거대한 떠돌이 개, 마을 사람들은 총을 들고 그 개를 추적합니다. 그런데 꼬마 세바스찬만은 달랐습니다. 진흙을 뒤집어쓴 그 개의 눈동자에서 위협이 아닌 무언가를 본 것입니다. 세바스찬은 그 개에게 '벨(Belle)'이라는 이름을 붙여주고, 흙먼지를 씻어내자 눈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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