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체 글126 영화 앙: 단팥 인생 이야기 (효율주의, 한센병, 존재의 의미) 솔직히 저는 오랫동안 '효율성'이 미덕인 줄로만 알았습니다. 40대 직장인으로 살다 보면 어느 순간 사람도, 시간도, 심지어 가족까지도 생산성의 잣대로 재는 자신을 발견하게 됩니다. 일본 영화 〈앙: 단팥 인생 이야기〉는 그런 저를 조용히, 그러나 아주 단단하게 때린 작품이었습니다.공장제 앙금과 효율주의의 민낯영화의 주인공 센타로는 도라야키 가게를 운영하면서도 정작 단팥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빚을 갚는다는 이유 하나로 값싼 공장제 앙금(시판 팥 앙금)을 써서 기계적으로 도라야키를 찍어냅니다. 여기서 공장제 앙금이란 대량 생산 시스템에서 균일한 품질로 만들어진 규격화된 식재료를 의미합니다. 효율은 극대화되지만 그 과정에서 어떤 정성이나 고유한 맛은 사라집니다.제가 이 장면에서 멈칫했던 건, 그 모습이 너무.. 2026. 4. 18. 쓰리 빌보드 영화 리뷰 (정당한 분노, 용서의 역설, 카타르시스) 사춘기 아이와 거실에서 말다툼을 벌이고 나서, 방문 쾅 소리가 사라진 조용한 집 안에 혼자 앉아 본 적 있으신가요. 저는 그 순간이 영화 한 편을 보고 나서야 비로소 이해가 됐습니다. 딸을 잃은 어머니의 이야기를 담은 영화 쓰리 빌보드(Three Billboards Outside Ebbing, Missouri)를 보고 나서입니다.정당한 분노가 광고판 세 개가 되는 순간미국 미주리주의 작은 시골 마을. 딸 앤젤라가 강간당하고 불에 타 살해된 지 7개월이 지났지만 경찰 수사는 제자리걸음입니다. 어머니 밀드레드는 마을 외곽의 낡은 광고판 세 개를 빌려 경찰서장 윌러비의 무능을 새빨간 글씨로 공개적으로 고발합니다.밀드레드의 분노는 누가 보아도 100% 정당했습니다. 저도 처음엔 그녀 편이었고, 마음속으로 박수를.. 2026. 4. 17. 영화 모짜르트와 고래 리뷰(아스퍼거, 완벽주의자, 규칙의 방) 퇴근 후 겨우 정돈해 둔 거실이 아내와 딸들의 이불 텐트로 박살 나 있던 그날, 저는 이 영화를 다시 떠올렸습니다. 영화 모짜르트와 고래는 아스퍼거 증후군을 가진 두 사람의 로맨스를 다루는데, 단순히 따뜻한 사랑 이야기로 소비하기에는 너무 뾰족하고 너무 정직한 영화입니다.아스퍼거 증후군, 장애인가 다름인가아스퍼거 증후군(Asperger Syndrome)이라는 말을 처음 들었을 때 막연히 '자폐의 일종'이라고만 알고 있던 분들이 많을 겁니다. 저도 그랬습니다. 여기서 아스퍼거 증후군이란 자폐 스펙트럼 장애(ASD, Autism Spectrum Disorder)의 한 유형으로, 지적 능력과 언어 발달은 정상 범주에 있지만 사회적 상호작용과 비언어적 의사소통에 어려움을 겪는 신경발달 특성을 말합니다. 쉽게 말.. 2026. 4. 16. 영화 이름들로 만든 노래 리뷰 (데뷔 무대, 빈 책상, 기억하는 삶) 성공을 향해 달려가는 것이 삶의 의무라고 믿으셨나요? 저도 그렇게 살았습니다. 그런데 영화 한 편이 그 믿음을 조용히 흔들었습니다. 천재 바이올리니스트가 데뷔 무대를 버리고 사라진 이유가 단순한 도망이 아니라, 죽어간 자들의 이름을 기억하기 위한 선택이었다는 것. 그 진실이 뼈아프게 다가온 것은 제가 직접 겪은 상실의 경험이 있었기 때문입니다.천재는 왜 데뷔 무대를 버렸는가1951년 런던. 촉망받는 바이올리니스트 도비들의 데뷔 콘서트(debut concert)를 보기 위해 사회 각층의 유명 인사들이 공연장을 가득 채웠습니다. 데뷔 콘서트란 신인 연주자가 처음으로 대중 앞에 서는 무대로, 연주자의 일생을 통틀어 가장 중요한 순간으로 꼽힙니다. 그런데 도비들은 그 자리에 나타나지 않았습니다.35년 후 친구 .. 2026. 4. 15. 영화 결백 리뷰 (고향, 어머니의 진실, 불편한 메시지) 스무 살 가을, 어머니가 시장 일을 마치고 곧장 버스를 타고 제 자취방 앞에 나타나신 날이 있었습니다. 양손에 김치통과 밑반찬 봉지를 한가득 들고서요. 저는 그날 어머니를 반기기는커녕 동기들 앞에 들킨 제 '초라한 밑바닥'이 부끄러워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습니다. 영화 결백을 보고 나서야, 그 기억이 이렇게까지 오래 저를 괴롭히는 이유를 알았습니다.고향을 지운 사람들, 추인회와 정인의 닮은 꼴영화 결백은 대한민국 최고 로펌의 에이스 변호사 정인이 치매에 걸린 어머니의 살인 혐의를 벗기기 위해 시골 고향으로 내려가는 이야기입니다. 제가 처음 이 영화를 봤을 때 눈에 들어온 건 법정 장면보다 정인이 고향을 대하는 태도였습니다. 폭력적인 아버지, 무기력해 보이는 어머니, 자폐를 가진 동생. 그녀는 그 전부를 .. 2026. 4. 14. 영화 드라이빙 미스 데이지 (존엄의 문제, 돌봄의 방식, 시선의 변화) 아버지의 차 키를 억지로 빼앗으려다 서로 등을 돌린 날, 저는 한동안 그 장면이 머릿속에서 지워지지 않았습니다. 그러다 우연히 1989년 아카데미 작품상 수상작 드라이빙 미스 데이지를 다시 꺼내 봤고, 영화가 끝날 즈음엔 후회와 반성이 뒤섞인 감정으로 한참을 멍하니 앉아 있었습니다. 늙어가는 부모를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 이 영화가 너무 조용하고 정확하게 짚어냈기 때문입니다.차 키 한 장이 건드린 존엄의 문제1948년 미국 조지아주, 70대 유대인 할머니 데이지는 후진 도중 이웃 마당을 들이받는 사고를 냅니다. 아들 불리는 어머니의 안전을 위해 흑인 운전기사 호크를 고용하지만, 데이지는 처음부터 그를 투명 인간 취급하거나 도둑으로 의심합니다. 처음 이 장면을 볼 때는 "저 할머니 참 까탈스럽다"는 생각이.. 2026. 4. 13. 이전 1 ··· 7 8 9 10 11 12 13 ··· 21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