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분류 전체보기126

영화 신과 함께 가라 후기 (로드무비, 아카펠라, 계획표) 완벽한 계획을 세워두고 여행을 떠났다가, 예상치 못한 순간에 오히려 더 행복했던 경험이 한 번쯤은 있으실 겁니다. 저도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다 독일 영화 한 편을 보고 나서, 그 유쾌한 실패가 사실은 실패가 아니었다는 걸 새삼 확인했습니다. 수도사 세 명이 이탈리아로 걸어가는 이야기, 영화 신과 함께 가라입니다.300년 만에 세상으로 나온 수도사들의 로드무비저는 본래 여행을 갈 때면 시간 단위로 일정을 짜는 지독한 계획형 아빠입니다. 두 딸아이와 떠난 봄 여행에서도 역사박물관과 유적지 답사를 빽빽하게 넣어두고 운전대를 잡았습니다. 그런데 고속도로를 달리던 중, 뒷좌석에서 "아빠, 저기 관람차 있어! 저기 가면 안 돼?"라는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저는 단호하게 "계획에 없는 일이야"라고 선을 그었습니.. 2026. 4. 23.
영화 나의 그리스식 웨딩 리뷰 (일상탈출, 문화충돌, 대가족) 세련된 가족 파티를 망치는 가장 큰 적이 뭔지 아십니까? 바로 가족 그 자체입니다. 저는 이 영화를 보는 내내 지난달 막내딸 생일날 예고 없이 들이닥친 양가 친척들을 떠올리며 낄낄거렸습니다. 로맨틱 코미디(Romantic Comedy) 장르 영화가 이렇게까지 현실 공감을 자극할 줄은 몰랐습니다.반복되는 일상에서 탈출하는 법시카고에 사는 그리스계 미국인 툴라는 가족이 운영하는 식당에서 매일 같은 일을 반복합니다. 그녀의 문제는 단순히 지루함이 아닙니다. 자신감 부재, 부모의 기대, 그리고 꿈조차 스스로 포기해 버린 무기력함이 켜켜이 쌓여 있었습니다.심리학에서는 이런 상태를 학습된 무기력(Learned Helplessness)이라고 부릅니다. 학습된 무기력이란 반복적인 실패나 통제 불가능한 상황에 오래 노출.. 2026. 4. 22.
에브리씽 머스트 고 영화 리뷰 (집착, 관계, 마음 비우기) 물건을 버리는 것이 과거를 버리는 것과 같다면, 우리는 왜 그토록 버리지 못하고 살까요. 저는 40대 중반에 서재를 정리하다가 그 질문 앞에서 한참을 멈춰 섰습니다. 손에 쥔 낡은 다이어리 한 권이 갑자기 10킬로그램짜리 돌덩이처럼 느껴지던 그 순간, 영화 한 편이 떠올랐습니다.영화가 보여주는 집착의 민낯2010년 개봉한 영화 '에브리씽 머스트 고'는 중년 남성의 실패담을 꽤 불편할 정도로 정직하게 그려냅니다. 16년간 헌신한 회사에서 해고당한 날, 집에 돌아온 주인공 닉을 반기는 것은 굳게 잠긴 현관문과 잔디밭에 낱낱이 펼쳐진 자신의 살림살이였습니다. 안락의자, 턴테이블, 골프채, 낡은 잡지더미. 아내는 닉이 집에 없는 사이 계좌를 동결하고 집을 나가버렸고, 닉은 결국 그 잔디밭에서 먹고 자는 처지가 .. 2026. 4. 21.
영화 굿모닝 에브리원 (권위의식, 세대갈등, 유연한 리더십) 솔직히 이건 예상 밖이었습니다. 그냥 가볍게 틀어놓은 오피스 코미디 한 편이 40대 중간 관리자인 저를 이렇게 뜨겁게 찌를 줄은 몰랐습니다. 영화를 보는 내내 스크린 속 꼬장꼬장한 노장 앵커 마이크 포메로이가 저 자신과 겹쳐 보였고, 영화가 끝난 뒤 한참 동안 소파에서 일어나지 못했습니다. "나는 직장에서, 집에서 지금 어떤 어른으로 살고 있는가." 그 질문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습니다.권위의식이라는 함정저도 처음엔 그게 문제인 줄 몰랐습니다. 40대 중반에 팀장이 된 뒤부터, 저는 어느새 회의실에서 팔짱을 끼고 앉는 사람이 되어 있었습니다. 젊은 후배들이 SNS 마케팅 아이디어를 꺼내거나, 숏폼 콘텐츠를 활용한 기획안을 들고 오면, 저는 속으로 제가 10년 전에 이끌었던 굵직한 프로젝트들을 떠올리며 ".. 2026. 4. 21.
영화 원 위크 리뷰 (정해진 출구, 모터사이클, 40대 가장) 솔직히 말씀드리면, 저는 이 영화를 보면서 한 번도 울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영화가 끝나고 한참 동안 화면을 멍하니 바라봤습니다. 시한부 선고를 받은 주인공이 치료도 미루고 낡은 모터사이클을 몰고 서쪽으로 달려 나가는 그 첫 장면에서, 제 가슴 어딘가가 묘하게 덜컹했기 때문입니다.정해진 출구를 지나쳐 본 적 있으신가요영화 속 국어 교사 벤은 말기암 진단을 받은 날, 병원 대신 중고 모터사이클 판매점으로 걸어 들어갑니다. 그리고 아무런 계획도 없이 캐나다 토론토에서 서쪽 끝 태평양을 향해 달리기 시작하죠. 약혼녀 사만다의 눈물도, 가족의 만류도, 세상의 상식적인 압박도 모두 뒤로한 채.저도 비슷한 충동을 경험한 적이 있습니다. 몇 해 전 끝없는 실적 압박과 대출 이자, 아이들 교육비로 숨이 턱턱 막히던 어.. 2026. 4. 20.
마지막 4중주 영화 리뷰 (불협화음, 인정투쟁, 조율) 7악장을 단 한 번의 쉼도 없이 연주해야 하는 곡이 세상에 있습니다. 베토벤 현악 4중주 14번(Op. 131)이 바로 그렇습니다. 저는 이 사실을 영화 한 편을 보다가 처음 알았고, 그 순간 얼마 전 아내와 핏대를 세웠던 씁쓸한 주말 거실이 떠올랐습니다.불협화음 — 25년의 균열은 어떻게 시작되는가결성 25주년을 앞둔 현악 4중 주단 '푸가(Fugue)'에서 첼리스트 피터가 파킨슨병 진단을 받습니다. 여기서 파킨슨병이란 도파민 신경세포가 서서히 손상되면서 손 떨림, 경직 등의 운동 장애가 나타나는 신경퇴행성 질환입니다. 활로 현을 당기는 행위가 생명인 연주자에게 이 진단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느껴집니다.그런데 정작 영화에서 더 날카롭게 다가온 건 피터의 병보다, 그 소식이 터뜨린 .. 2026. 4. 19.

소개 및 문의 · 개인정보처리방침 · 면책조항

© 2026 블로그 이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