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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직히 저는 꽤 오랫동안 제 취향이 가족보다 '우월하다'고 믿었습니다. 고전문학을 읽고 클래식 음악을 들으면서, 아내의 드라마와 딸아이의 웹소설을 속으로 비웃었죠. 영화 <리버럴 아츠>를 보다가 35살 입학 사정관 제스가 19살 지비의 취향을 신랄하게 깎아내리는 장면에서 저는 등줄기가 서늘해졌습니다. 저 사람이 바로 나였으니까요.
지적 허영심이라는 달콤한 함정
영화 속 제스는 전형적인 인문학적 엘리트주의(Intellectual Elitism)에 사로잡힌 인물입니다. 여기서 인문학적 엘리트주의란, 특정 장르의 문학이나 예술을 소비하는 것이 곧 자신의 지성과 품격을 증명한다고 믿는 태도를 말합니다. 쉽게 말해, 두꺼운 철학책을 읽는 내가 드라마를 보는 당신보다 '더 깊은 사람'이라는 착각이죠.
제가 직접 그 착각 속에서 살아봤는데, 그 감각은 생각보다 훨씬 중독적입니다. 주말마다 리모컨을 빼앗아 다큐멘터리를 틀어놓고, 아내가 즐겨 보는 주말 드라마에 "저런 뻔한 막장을 왜 봐"라며 혀를 찼습니다. 심리학에서는 이를 문화적 자본(Cultural Capital) 개념으로 설명합니다. 문화적 자본이란 사회학자 피에르 부르디외가 제시한 개념으로, 특정 취향과 교양이 사회적 우위를 점하는 데 활용되는 무형의 자산을 뜻합니다(출처: Britannica). 문제는 이 자본이 가정 안에서 권력으로 둔갑할 때입니다.
영화 속 페어필드 교수(앨리슨 제니)는 그 끝을 보여줍니다. 겉으로는 흠잡을 데 없는 지식인이지만, 속은 냉소와 고독으로 텅 비어있는 인물이죠. 저도 그 길을 걷고 있었습니다. 거실에서 가족들의 웃음소리가 하나씩 사라지고 있다는 것을, 그때는 제대로 보지 못했습니다.
- 인문학적 엘리트주의: 고급 취향이 곧 우월한 인격이라는 착각
- 문화적 자본의 역기능: 가정 안에서 권력과 거리감으로 변질
- 페어필드 교수의 말로: 지적 우월감이 남긴 것은 지독한 고독뿐
취향 존중이 만들어낸 예상 밖의 교감
영화에서 가장 강렬한 반전은 지비가 제스에게 보내는 편지 한 통입니다. "어떤 책이 나를 행복하게 해 준다면 그건 좋은 책이에요. 당신의 지적 우월감이 당신을 얼마나 외롭고 부정적으로 만드는지 돌아보세요." 이 장면을 보면서 저는 거의 반사적으로 중학생 딸아이의 얼굴이 떠올랐습니다.
그날 딸아이는 방 구석에서 하이틴 로맨스 웹소설을 몰래 읽고 있었습니다. 평소라면 당장 스마트폰을 압수했겠지만, 그날따라 아이가 눈물을 찔끔 흘리며 킥킥거리는 모습에 묘한 호기심이 일었습니다. 저는 훈계 대신 아이 옆에 털썩 주저앉았습니다. "그렇게 재밌어? 아빠도 좀 같이 보자."
아이는 흠칫 놀랐지만 이내 눈을 반짝이며 남자 주인공의 오글거리는 대사들을 설명해 주기 시작했습니다. 말도 안 되는 전개와 낯간지러운 대사를 함께 소리 내어 읽으며, 우리는 침대 위를 뒹굴며 숨이 넘어가라 웃어젖혔죠. 제가 그토록 무시했던 '영양가 없는' 웹소설이, 그 어떤 위대한 고전문학도 해주지 못했던 딸과의 완벽한 교감을 만들어낸 겁니다.
이것은 단순한 우연이 아닙니다. 심리학에서는 이를 공감적 참여(Empathic Engagement)라고 부릅니다. 공감적 참여란 상대방의 관심사와 감정 세계에 자발적으로 진입함으로써 형성되는 정서적 유대 방식입니다. 제스가 지비의 뱀파이어 소설을 끝까지 읽어낸 뒤 마음이 열리는 장면이 바로 그 순간이고, 저와 딸아이의 침대 위 웃음도 정확히 같은 원리였습니다(출처: American Psychological Association).
나이 듦을 받아들인다는 것의 진짜 의미
영화에서 가장 서글프고도 아름다운 장면은 피터 교수(리처드 젠킨스)의 퇴임 연설입니다. "37년이 지났는데, 이제는 계산하는 것 자체가 두렵다"라고 고백하는 그의 목소리엔 나이 드는 것을 끝내 받아들이지 못한 사람의 쓸쓸함이 가득합니다. 제스 역시 35살이 되어서도 대학 캠퍼스를 맴돌며 22살의 감각으로 살고 싶어 합니다. 심리학에서는 이를 정체성 고착(Identity Foreclosure)이라고 합니다. 특정 시기의 자아상에 고정된 채, 현재의 나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기를 거부하는 심리적 상태를 말합니다.
솔직히 이건 예상 밖이었습니다. 제가 고상한 취향에 집착했던 이유가, 실은 나이 들어가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었다는 것을요. 두꺼운 고전문학과 다큐멘터리는 '나는 아직 진지하고 치열한 사람'이라는 증거가 필요했던 겁니다. 40대 가장이 되어서도 지적으로 팽팽하다는 것을 스스로에게 증명하고 싶었던 거죠.
영화 속 괴짜 철학자 냇(잭 에프론)은 엉뚱한 말만 늘어놓는 것 같지만, 사실 그는 제스에게 가장 핵심적인 말을 건넵니다. "그냥 흘러가게 둬라." 지식과 논리로 삶을 통제하려는 제스에게, 나이 듦이란 어쩌면 통제를 내려놓는 연습임을 일깨우는 대사입니다. 결말에서 제스는 자신과 비슷한 나이의 사람들 곁으로 돌아와 현재를 온전히 껴안습니다. 저 역시 딸아이의 침대 위에서, 40대의 나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기로 했습니다. 꼰대의 껍데기를 벗고, 가족들이 푹 빠져있는 아이돌 춤을 함께 따라 추는 유쾌하고 소란스러운 아빠로 늙어가기로요.
자주 묻는 질문
Q. 영화 <리버럴 아츠>는 어떤 분들에게 추천하나요?
A. 자신의 취향이나 가치관이 주변 사람보다 '더 높다'고 은연중에 느끼는 분들께 특히 권해드립니다. 지적 우월감과 외로움의 상관관계를 이렇게 따뜻하고 유쾌하게 풀어낸 영화가 드물기 때문입니다. 40대 이상의 가장이나 부모님께도 공명이 큰 작품입니다.
Q. 영화에서 나이 차이 로맨스가 결국 어떻게 되나요?
A. 제스와 지비는 결국 연인이 되지 않습니다. 16살이라는 나이 차를 계산하며 제스 스스로 선을 긋고, 지비 역시 제스가 자신을 통해 잃어버린 청춘을 되찾으려 했다는 사실을 직시합니다. 영화는 이 관계를 통해 '나이 차 로맨스의 가능성'보다는 '자기 자신의 현재를 직면하는 용기'를 더 중요하게 다룹니다.
Q. 문화적 자본이라는 개념이 실생활에서 어떻게 부작용을 일으키나요?
A. 문화적 자본은 원래 사회 계층 이동을 설명하는 학문적 개념이지만, 가정 안에서는 '내 취향이 더 고급하다'는 위계감으로 변질되기 쉽습니다. 부르디외의 연구에 따르면 이 위계감은 상대를 무의식적으로 평가하고 배제하는 방식으로 작동합니다. 가족 간 대화가 줄고 거실 분위기가 차가워지는 것이 대표적인 신호입니다.
Q. 가족의 취향을 함께 즐겨주는 게 억지스럽지 않을까요?
A. 처음에는 분명 어색합니다. 제 경험상 이건 좀 다릅니다. 관심을 갖고 이유를 물어보는 순간, 어색함보다 호기심이 먼저 올라옵니다. 상대가 왜 저 장면에서 웃는지, 왜 저 노래를 반복해서 듣는지를 진심으로 궁금해하는 것, 그것 자체가 이미 공감적 참여의 시작입니다.
결론
<리버럴 아츠>는 인문학과 예술을 사랑하면서도, 그 사랑이 타인을 향한 무기가 되어버린 사람들에게 건네는 가장 다정한 경고입니다. 제스가 결국 깨닫듯이, 진짜 교양이란 두꺼운 책을 읽는 능력이 아니라 곁에 있는 사람이 무언가에 환하게 웃을 때 그 웃음의 이유를 기꺼이 물어볼 수 있는 유연한 마음입니다.
저는 이제 거실에서 다큐멘터리를 고집하는 피곤한 꼰대로 늙지 않으려 합니다. 딸아이의 웹소설 주인공 이름을 외우고, 아내의 드라마 결말을 함께 기다리고, 가족들이 좋아하는 아이돌의 안무를 어설프게 따라 추는, 그 소란스럽고 유치한 순간들이 사실은 가장 위대한 인문학(Liberal Arts)이자 진짜 행복이라는 것을 이제는 압니다. 영화를 보고 나면, 오늘 밤 소파에서 가족 옆에 앉고 싶어질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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