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가족 영화는 보고 나면 따뜻해진다고들 합니다. 정말 그럴까요? 저는 <걸어도 걸어도>를 보고 나서 오히려 가슴 한구석이 서늘해졌습니다. 그리고 그 서늘함이, 어떤 감동보다 오래 남았습니다.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이 어머니를 잃은 슬픔을 소화하는 과정에서 탄생시킨 이 영화는, 가족이란 단어에 우리가 품고 있는 환상을 조용히, 그러나 정확하게 찌릅니다.
신파 없이도 가슴을 찌르는 서사 구조
일반적으로 가족 영화라고 하면 극적인 화해 장면이나 눈물을 쏟아내는 절정부가 있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그런데 제 경험상 그런 영화들은 극장 밖을 나서는 순간 급속도로 증발합니다. <걸어도 걸어도>는 다릅니다. 이 영화에는 오열 신도 없고 감동적인 화해 장면도 없습니다. 그저 밥을 먹고, 차를 마시고, 계단을 오르내릴 뿐입니다.
영화의 서사는 10년 전 물에 빠진 소년을 구하다 숨진 장남 준페이의 기일을 중심으로 흘러갑니다. 막내아들 료타가 재혼한 아내 유카리, 그리고 유카리가 전 남편과의 사이에서 낳은 아들 아츠시를 데리고 본가를 찾아오는 하루가 이야기의 전부입니다.
여기서 고레에다 감독이 구사하는 것이 바로 미장센(mise-en-scène) 기법입니다. 미장센이란 카메라 앵글이나 조명, 배우의 동선 등 화면 안에 배치되는 모든 시각적 요소로 감정과 의미를 전달하는 연출 방식을 말합니다. 이 영화에서는 요리하는 어머니의 손, 무심코 시선을 피하는 아버지의 옆모습, 어색하게 앉은 가족들의 거리감 같은 것들이 대사 없이도 이 가족의 내력을 전부 설명해 냅니다. 제가 처음 이 장면들을 볼 때 "아, 이 집 분위기 안다"는 느낌이 들었는데, 그게 무섭도록 정확했습니다.
어머니의 옥수수 튀김, 사랑인가 통제인가
영화에서 가장 상징적인 장면은 어머니 토시코가 온 가족을 위해 옥수수튀김을 만드는 장면입니다. 일반적으로 음식을 만드는 어머니의 모습은 희생과 사랑의 표상으로 읽힌다고 알려져 있지만, 저는 이 장면을 보며 그것만이 전부가 아니라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습니다.
토시코는 식탁 위에 정성껏 차린 음식들로 가족을 불러 모으고, 며느리 유카리가 레시피에 관심을 보이지 않자 은근히 실망하는 기색을 드러냅니다. 故 키키 키린이 연기한 이 어머니는 단순히 헌신적인 인물이 아닙니다. 죽은 아들 준페이를 구하다 살아남은 소년 요시오를 매년 기일에 불러들여, "그래야 우리 준페이의 죽음이 덜 억울하지"라고 담담하게 내뱉는 그 장면에서 저는 등골이 서늘해졌습니다.
이것은 심리학에서 말하는 투사적 동일시(projective identification)와 유사한 기제입니다. 투사적 동일시란 자신의 감당하기 힘든 감정을 타인에게 전가함으로써 무의식적으로 그 감정을 처리하려는 심리적 방어 기제를 말합니다. 토시코는 슬픔과 억울함을 요시오에게 조용히 전가함으로써 자신의 상실감을 견뎌온 것입니다. 모성애의 가장 솔직하고 잔인한 밑바닥이 그렇게 우아하게 드러나는 장면은, 제가 본 수많은 가족 영화 중에서 이 작품 외에는 없었습니다.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영화 세계를 분석한 연구들에 따르면, 그는 일관되게 "죽음 그 자체보다 남겨진 자들의 삶"에 초점을 맞추는 작가적 관점을 유지해 왔습니다(출처: 한국영상자료원). <아무도 모른다>에서는 버려진 아이들을, <디스턴스>에서는 가해자의 유가족을 카메라에 담았습니다. <걸어도 걸어도>는 그 연장선에서 죽은 장남으로 인해 해마다 모이는 남겨진 가족의 내면을 섬세하게 그려냅니다.
아버지와 아들, 40대가 되어서야 보인 것들
솔직히 이건 예상 밖이었습니다. 료타와 아버지의 관계가 저 자신과 저희 아버지를 이렇게 정확하게 비춰낼 줄은 몰랐습니다.
은퇴한 의사인 아버지 교헤이는 여전히 권위적이고, 가족들과 좀처럼 섞이지 못하며, 거실 텔레비전 앞에 섬처럼 앉아 있습니다. 료타는 그 옆에서 어색하게 시간을 때웁니다. 제가 40대가 되어 명절에 본가에 내려갔을 때 아버지 옆에서 휴대폰만 만지작거리던 그 장면과 화면 속 료타의 모습이 정확하게 겹쳤습니다.
아버지는 여전히 자신의 의원을 료타에게 물려주고 싶어 하고, 료타는 그 강압적인 방식이 불편해 거부합니다. 어릴 적 꿈은 형과 함께 아버지처럼 의사가 되는 것이었지만, 형이 죽고 나서 그 꿈에서 멀어졌다는 설정은 료타라는 인물의 상처를 군더더기 없이 설명합니다.
<걸어도 걸어도>가 보여주는 가족 역학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 가족이기 때문에 모든 것을 이해할 수 있다는 환상
- 가족이기 때문에 오히려 더 들키기 싫은 진짜 감정들
- 가족이기 때문에 상처받은 말을 아무렇지 않게 던지는 잔인함
- 그 모든 것을 "가족이니까"라는 말로 덮어버리는 관성
영화 후반부, 본가를 떠나며 료타가 독백으로 내뱉는 "항상 이렇다니까. 꼭 한 발씩 늦는다"는 대사는 제 가슴에 묵직한 돌덩이를 얹었습니다. 부모님이 돌아가신 후에야 뒤늦게 떠오르는 약속들과 다짐들. 저도 그 후회를 압니다.
카타르시스는 눈물이 아닌 인정에서 온다
일반적으로 가족 영화의 카타르시스는 화해와 눈물에서 온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그런데 제 경험상 <걸어도 걸어도>가 주는 해방감은 전혀 다른 곳에서 왔습니다. 바로 "우리 가족의 그 어색함이 사실 비정상이 아니었구나"라는 인정에서 입니다.
카타르시스(catharsis)란 원래 아리스토텔레스가 정의한 개념으로, 비극을 통해 관객이 억눌렸던 감정을 해소하고 정화되는 심리적 경험을 의미합니다. <걸어도 걸어도>는 결말에서 서로를 완전히 이해하지 못한 채 부모의 죽음을 맞이하는 료타를 담담하게 비춥니다. 해피엔딩이 아닙니다. 그러나 남겨진 료타가 자신의 가족과 함께 아버지가 걷던 그 계단을 묵묵히 걸어 오르는 장면에서, 삶이란 그렇게 계속된다는 덤덤한 진실이 전해집니다.
한국영화진흥위원회의 자료에 따르면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작품들은 국내에서도 꾸준히 예술영화 관객층을 형성해 왔으며, <걸어도 걸어도>는 그중에서도 40대 이상 관객에게 특히 높은 공감 지수를 기록한 작품으로 분류됩니다(출처: 영화진흥위원회). 제가 그 통계가 왜 그런지 이 영화를 보고 나서야 이해했습니다.
저는 이 영화를 부모님 댁에 가는 일이 왠지 무겁고 숙제처럼 느껴지는 분들, 그리고 부모님의 늙어가는 모습에 마음이 찌릿하면서도 막상 마주 앉으면 짜증부터 튀어나와 돌아서서 후회하는 분들에게 특히 권하고 싶습니다.
이 영화를 보고 나면 아마 우리 가족의 지독한 어색함과 투박함이 사실 아주 평범한 삶의 풍경이었다는 걸 깨닫게 됩니다. 저도 살가운 아들이 되는 건 이번 생엔 글렀을지 모릅니다. 다음번 본가에 내려가면 또 아버지 옆에서 할 말이 없을 것이고, 어머니 잔소리에 미간을 찌푸릴 것입니다. 그래도 이제는 그 서툰 발걸음을 부끄러워하지 않으려 합니다. 부모님이 아직 곁을 걷고 계실 때, 한 발씩 늦더라도 괜찮으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