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당신은 지금 살고 있는 집에서 진짜 '집'을 느끼고 계십니까? 저는 이 질문에 자신 있게 고개를 끄덕이지 못했습니다. 영화 <노매드랜드>를 보고 나서야, 제가 그토록 집착해온 것이 '홈(Home)'이 아니라 그냥 비싼 '하우스(House)'였다는 사실을 뼈저리게 깨달았습니다. 2008년 금융 위기의 파고 속에서 공장 마을 전체가 사라지고 길 위로 내몰린 한 여인의 이야기가, 40대 가장이었던 저의 부끄러운 민낯을 정확히 짚어냈습니다.
홈리스가 아닌 하우스리스 — 소유 집착이 빼앗아간 것들
영화 속 펀은 예전 제자와 마트에서 마주칩니다. 제자가 "선생님, 혹시 홈리스가 되신 건가요?"라고 묻자 펀은 옅은 미소와 함께 단호히 답합니다. "아니, 나는 홈리스가 아니야. 하우스리스일 뿐이지. 그 둘은 다르단다." 이 한 마디가 저를 후려쳤습니다. 홈리스(Homeless)란 영혼이 쉴 안식처 자체를 잃은 상태를 의미하고, 하우스리스(Houseless)는 단지 물리적인 거처가 없는 상태를 뜻합니다. 쉽게 말해, 집이라는 공간이 없어도 마음의 '집'을 품고 있다면 그 사람은 홈리스가 아닙니다.
제가 직접 겪어보니 이 구분이 얼마나 정확한지 알겠더군요. 저는 40대 가장 시절, 넓은 브랜드 아파트가 곧 가족의 행복이라는 공식에 단단히 갇혀 있었습니다. 무리하게 대출을 끌어모아 평수를 넓히고, 값비싼 가구를 채워 넣는 데 혈안이 되어 있었죠. 퇴근 후 대형 소파에 앉아 "역시 집이 좋아야 가족이 행복하지"라고 자위했지만, 정작 빚을 갚으려 주말 특근을 나가며 아이들과 눈 한번 제대로 맞추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영화의 배경이 된 실제 사건은 냉혹합니다. 2011년, 미국 네바다주 엠파이어 마을은 US 석고 공장의 폐쇄로 88년 만에 우편번호마저 말소되며 사실상 지도에서 지워졌습니다. 이처럼 산업 공동화(Industrial Hollowing-out) — 특정 산업의 쇠퇴로 지역 경제 기반 자체가 무너지는 현상 — 가 한 번 일어나면 개인의 의지와 무관하게 삶의 터전이 통째로 사라집니다. 출처: Pew Research Center의 조사에 따르면 2008년 금융 위기 이후 미국에서 집을 잃거나 차량 거주를 선택한 성인 인구는 수백만 명에 이르렀습니다. 펀의 이야기는 결코 개인의 실패가 아니었던 것입니다.
그러던 제게 작은 사건이 하나 있었습니다. 이사 날짜가 엇갈리는 바람에 가구를 전부 창고에 맡기고 텅 빈 새집에서 하룻밤을 보내야 했던 날이었습니다. 이불도, TV도, 소파도 없는 썰렁한 거실에서 저는 자괴감에 빠져 연신 한숨만 쉬었죠. 그런데 캠핑용 침낭 두 개를 펼쳐놓고 거실을 뛰어다니던 아이들은 까르르 웃으며 열광했습니다. 아내는 돗자리에 앉아 컵라면 뚜껑을 열며 "짐이 없으니 이렇게 홀가분할 수가 없네"라고 했죠. 그 순간 저는 망치로 머리를 얻어맞은 느낌을 받았습니다.
- 제가 지키려 한 것은 '가족의 행복(Home)'이 아니라 남들에게 보여주기 위한 콘크리트 덩어리(House)였습니다.
- 가구 하나 없는 빈 거실 바닥에서 서로 무릎을 맞대고 낄낄거리는 그 순간이야말로, 우리 가족이 가장 완벽하게 연결된 진짜 '집'이었습니다.
- 소유한 물건의 부피와 행복의 크기는 결코 비례하지 않습니다. 그날 밤이 증명해줬습니다.
상실과 회복 — 노매드랜드가 말하는 길 위의 연대
솔직히 이건 예상 밖이었습니다. 영화를 보기 전, 저는 이 작품이 미국 빈곤층의 처절한 생존기일 거라고 짐작했습니다. 그런데 실제로 스크린을 마주하니 전혀 달랐습니다. 영화는 노인 빈곤(Elderly Poverty) — 은퇴 이후 사회 안전망 밖으로 밀려난 고령층의 경제적 취약 상태 — 과 주거 불안정이라는 묵직한 구조적 문제를 다루면서도, 이를 분노나 비관으로 소비하지 않습니다. 대신 애리조나 사막의 노을과 사우스다코타의 황야를 배경으로 장엄한 서사시처럼 풀어냅니다.
클로이 자오 감독은 주인공 펀과 데이브를 제외한 거의 모든 등장인물을 실제 노매드(Nomad) — 일정한 거처 없이 이동하며 사는 현대의 유목민 — 들로 캐스팅했습니다. 여기서 노매드란 단순한 '방랑자'가 아니라, 저렴한 임시직과 계절직을 전전하며 차량을 집 삼아 스스로 생계를 꾸리는 실존하는 계층입니다. 이 선택 덕분에 영화는 픽션이 아닌 다큐멘터리처럼 숨을 쉽니다. 출처: Academy of Motion Picture Arts and Sciences는 이 작품에 제93회 아카데미 시상식 작품상·감독상·여우주연상을 수여했고, 제77회 베니스 국제 영화제 황금 사자상도 이 영화의 몫이었습니다.
제 경험상 이건 좀 다릅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 영화를 단순한 '힐링 무비'로 소비하는 경향이 있는데, 저는 오히려 이 영화에서 상당한 불편함을 느꼈습니다. 아마존 물류창고에서 프랜시스 맥도먼드가 테이프를 붙이고, 공중화장실을 청소하는 장면에서 — 그 뒷모습이 너무나 익숙한 누군가의 것처럼 보여서 — 눈물이 불쑥 차올랐습니다. 이 영화가 건드리는 건 타인의 불행이 아니라 '내가 외면해 온 나 자신의 공허함'이기 때문입니다.
영화 안에서 가장 오래 남는 장면은 멘토 스완키의 작별입니다. 시한부 판정을 받은 스완키는 죽음 앞에서도 담담히 절벽 위 독수리 둥지 이야기를 꺼냅니다. 자연의 경이로움을 충분히 목도했으니 후회가 없다고, 그녀는 고요히 미소 짓습니다. 노매드 공동체는 그녀가 떠난 뒤 모닥불에 돌을 던지며 기립니다. 오열 대신 담담한 경의. 이것이 그들이 상실을 견디는 방식입니다. 억지로 슬픔을 극복하려 발버둥 치는 대신, 상실을 자연의 일부로 받아들이는 그 성숙함이 저를 오히려 더 크게 흔들었습니다.
그들의 작별 인사는 "goodbye"가 아니라 "I'll see you down the road"입니다. 길 위에서 언젠가 다시 만날 것이라는 이 인사가 단순한 낙관주의가 아님을 영화는 보여줍니다. 느슨한 연대(Loose Solidarity) — 강한 구속 없이 필요할 때 서로의 타이어를 갈아주고 커피 한 잔을 나누며 이어지는 관계 방식 — 가 오히려 더 오래, 더 단단하게 사람을 붙잡는다는 사실을. 제가 직접 느낀 건 이것입니다. 거대한 아파트 평수보다, 쪼그려 앉아 컵라면을 나눠 먹는 그 체온이 훨씬 더 오래 남는다는 것을요.
영화를 다 보고 나서 한동안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했습니다. 스크린이 꺼진 뒤에도 광활한 사막의 노을이 눈꺼풀 안에 남아 있었습니다. 제 경험상 이렇게 오래 잔상이 남는 영화는 흔치 않습니다. 매일 대출 이자와 집값을 들여다보며 "이게 진짜 내 인생이 맞나"라는 공허함을 느끼고 계신 분이라면, 이 영화가 서늘한 해방의 바람처럼 다가올 것입니다.
저는 더 이상 부동산 앱을 들여다보며 평수를 넓히지 못해 안달하는 피곤한 가장이 되지 않으려 합니다. 대신 불필요한 짐들을 덜어내고, 낡은 침낭 속에서도 아이들과 살을 부비며 가장 따뜻한 체온을 나눌 수 있는 어른으로 살고 싶습니다. 영화를 보고 나서 딱 한 가지만 하셔도 됩니다. 오늘 저녁, 스마트폰을 내려놓고 가족의 눈을 한번 제대로 바라보는 것부터 시작해 보시길 권해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