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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에게 "비슷한 환경의 친구랑 어울려라"고 말해본 적 있으신가요. 저도 그랬습니다. 1999년에 개봉한 배리 레빈슨 감독의 영화 <리버티 하이츠>를 보고 나서야, 그 말이 얼마나 폭력적인 편견이었는지 뒤통수를 얻어맞은 것처럼 깨달았습니다. 1954년 볼티모어를 배경으로 한 이 영화는, 어른들이 쳐놓은 인종과 계급의 경계선을 가뿐히 넘어버리는 두 형제의 이야기입니다.
어른들이 세운 편견의 벽 — 아이들은 왜 그 선을 몰랐을까
영화의 배경인 1950년대 볼티모어는 '데 유어 세그리게이션(De Jure Segregation)', 즉 법률에 의한 인종분리 정책이 실제로 작동하던 시절입니다. 쉽게 말해, 수영장이나 공공시설 앞에 "유대인, 유색인종, 개 출입 금지"라는 팻말이 아무렇지 않게 걸려 있던 시대였습니다. 이 영화는 그 시절의 볼티모어를 그저 고발하는 데 그치지 않습니다. 어른들이 얼마나 우스꽝스러운 모순 속에서 살아가는지를 따뜻하고 유쾌하게 꼬집습니다.
유대인 가장 네이트 커츠먼은 흑인들을 상대로 불법 넘버스 래킷(Numbers Racket), 즉 지하 복권 도박 사업을 운영하며 돈을 법니다. 여기서 넘버스 래킷이란 특정 숫자에 돈을 걸어 맞추면 배당금을 받는 불법 복권 형태의 도박을 말하는데, 1950년대 미국 흑인 빈민가에서 광범위하게 퍼져 있던 지하경제의 한 축이었습니다. 그러면서도 아들이 흑인 소녀와 어울리는 것은 걱정합니다. 백인 상류층은 유대인을 멸시하면서 그들의 문화를 은근히 탐냅니다. 제가 영화를 보며 가장 쓴웃음이 났던 장면이 바로 이 부분이었습니다.
반면 두 아들, 벤과 밴은 다릅니다. 벤은 학교에서 처음으로 함께 수업을 듣게 된 흑인 소녀 실비아의 지성에 매료되고, 아버지가 걱정할 게 뻔한 그녀의 동네로 스스럼없이 걸어 들어갑니다. 사회학적으로 이를 '아웃그룹 접촉(Outgroup Contact)'이라고 부릅니다. 평소 자신과 다른 집단의 사람과 직접 교류하면 편견이 줄어든다는 개념인데, 1954년 사회심리학자 고든 올포트가 그의 저서에서 정리한 '접촉 가설(Contact Hypothesis)'이 바로 이것입니다(출처: American Psychological Association). 영화는 이 이론을 어떤 설명도 없이, 벤이 실비아의 차 바닥에 납작 엎드린 채 그녀의 동네를 둘러보는 단 하나의 장면으로 증명해 버립니다.
- 넘버스 래킷으로 흑인들의 돈을 받으면서 흑인과의 교류는 막는 아버지 네이트의 이중성
- 유대인을 차별하면서도 그들의 문화적 감수성을 동경하는 백인 상류층의 모순
- 어른들의 금기를 무시하고 경계 너머로 성큼 걸어가는 두 형제의 순수한 돌파력
성장과 우산 — 제 부끄러운 고백
영화를 보고 나서 저는 한동안 멍하게 앉아 있었습니다. 몇 년 전, 신축 브랜드 아파트로 이사를 온 뒤 큰딸에게 슬쩍 말했던 게 떠올랐기 때문입니다. "이왕이면 단지 안 친구들이랑 놀아. 길 건너 낡은 빌라 아이들은 아무래도 환경이 달라서 너랑 안 맞을 수도 있어." 입으로는 평등을 말하면서 속으로는 아파트 평수로 사람을 줄 세우고 있었던 겁니다. 제 마음속에도 1950년대 볼티모어처럼, "비슷한 수준끼리만 어울려야 안전하다"는 리버티 하이츠가 견고하게 세워져 있었던 셈입니다.
그 사실을 뼈저리게 확인한 건 퇴근길 폭우가 쏟아지던 날이었습니다. 딸 학원 앞으로 급히 차를 몰고 갔더니, 내가 은연중에 "어울리지 말라"라고 핀잔을 주었던 그 빌라촌 남자아이가 딸의 머리 위로 자신의 노란 우산을 한껏 기울여주고 있었습니다. 정작 본인의 한쪽 어깨와 등 가방은 빗물에 흠뻑 젖은 채로. 차창 너머로 그 장면을 바라보던 저는 핸들을 잡은 손이 부끄러워 어디라도 숨고 싶었습니다.
영화 속 벤이 실비아에게 다가가는 방식도 이 장면과 닮아 있습니다. 그는 거창한 선언도, 용기 있는 연설도 없이 그냥 걸어 들어갑니다. 무의식적으로 자기 세계의 바깥을 향해 발을 내딛는 것, 심리학에서는 이를 '행동 활성화(Behavioral Activation)'라고 합니다. 여기서 행동 활성화란 머릿속으로 고민하는 대신 먼저 행동을 취함으로써 감정과 인식을 바꿔나가는 접근 방식을 말하는데, 인지행동치료(CBT)에서 핵심 기법 중 하나로 쓰입니다(출처: National Institute of Mental Health). 그 아이도, 영화 속 벤도, 어른들처럼 머릿속으로 경계를 먼저 그리지 않았습니다. 그냥 움직였을 뿐입니다.
제가 직접 이 영화를 보고 나서 달라진 것이 있다면, 더 이상 딸에게 "어떤 친구를 사귀어라"고 말하지 않는다는 겁니다. 그 대신 누가 어디에 살든 먼저 우산을 기울여줄 수 있는 아이로 자라길, 말없이 응원하고 있습니다. 솔직히 이건 예상 밖의 변화였습니다. 영화 한 편이 40대 아버지의 오래된 습관을 바꿔놓을 줄은 몰랐으니까요.
자주 묻는 질문
Q. 리버티 하이츠, 어디서 볼 수 있나요?
A. 국내에서는 왓챠, 시즌(Seezn) 등 주요 OTT 플랫폼의 편성 변동이 잦으니 검색으로 현재 제공 여부를 확인하는 게 빠릅니다. 영어 원제는 Liberty Heights(1999)이고, 감독은 배리 레빈슨입니다. 없다면 DVD 구매도 방법입니다.
Q. 영화가 실화를 바탕으로 한 건가요?
A. 네, 배리 레빈슨 감독 본인의 유년기 볼티모어 경험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자전적 성격의 작품입니다. 그는 볼티모어를 배경으로 한 연작 시리즈를 여러 편 만들었는데, 리버티 하이츠는 그 중 인종 문제를 가장 정면으로 다룬 작품으로 평가받습니다.
Q. 아이와 함께 봐도 괜찮은 영화인가요?
A. 중학생 이상이라면 함께 보고 이야기 나누기에 아주 좋은 영화입니다. 성인 소재가 일부 포함되어 있어 초등학생 이하에게는 선별이 필요합니다. 제 경험상, 오히려 부모가 먼저 보고 "이런 편견을 나도 했었다"고 솔직하게 털어놓는 계기로 삼으면 훨씬 깊은 대화가 됩니다.
Q. 영화가 너무 무겁거나 불편하지는 않나요?
A. 오히려 반대입니다. 인종차별이라는 묵직한 소재를 다루면서도 전체 톤은 따뜻하고 유머가 넘칩니다. 고발이나 분노보다는 "어른들의 편견이 얼마나 코미디 같은지"를 애정 어린 시선으로 그려내기 때문에, 보는 내내 피식 웃다가 결말에서 뭉클해지는 구성입니다.
결론
제가 이 영화를 권하고 싶은 사람은 특별히 거창한 사회의식을 가진 분들이 아닙니다. "나는 차별 같은 거 안 해"라고 자신하는 40대 어른들, 그리고 그 아이들에게 은근히 편견을 물려주고 있을지 모르는 분들께 먼저 권하고 싶습니다. 영화를 보고 나면 자신이 쳐두었던 마음속의 경계선이 얼마나 허술하고 우스운 것이었는지 조용하게 확인하게 됩니다.
리버티 하이츠가 증명하는 것은 단 하나입니다. 진정한 자유(Liberty)는 비슷한 사람들끼리의 안전한 울타리 안이 아니라, 그 빗장을 열고 나와 서로 다름을 인정하며 섞일 때 비로소 완성된다는 것입니다. 오늘 저녁, 지금 내가 아이들에게 어떤 보이지 않는 팻말을 세워두고 있는지 한번 돌아보시길 권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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