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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직히 저는 오랫동안 아들에게 '남자답게'를 강요하며 그 아이의 가장 빛나는 순간을 외면했습니다. 영화 <빌리 엘리어트>를 보다가 제 꼴을 발견하고서야 그 사실을 인정할 수 있었습니다. 1984년 영국 탄광 마을의 이야기가 어떻게 40대 한국 아버지의 뒤통수를 이렇게 세게 칠 수 있는지, 저도 처음엔 몰랐습니다.
성별 편견이라는 중력, 그리고 아들 앞에서의 제 민낯
제가 직접 겪어보니, 아버지라는 자리는 생각보다 훨씬 더 오랫동안 '사회가 만들어 놓은 남성상'을 복사하여 아이에게 붙여 넣으려는 충동에 시달리는 자리였습니다. 중학생 아들이 축구나 태권도에는 영 흥미를 보이지 않고, 아이돌 댄스 영상을 보거나 혼자 그림을 그릴 때마다 저는 혀를 찼습니다. "사내자식이 뭘 그런 걸 좋아해"라는 말이 아이에게 얼마나 날카로운 말이었는지, 그때의 저는 까맣게 몰랐습니다.
영화 속 광부 아버지 재키는 없는 살림을 쪼개 아들 빌리를 권투 도장에 보냅니다. '거친 사내'로 키우고 싶었던 거죠. 그런데 빌리의 심장은 샌드백이 아니라, 체육관 한편에서 들려오는 발레 수업의 피아노 선율에 맞춰 뛰기 시작합니다. 재키는 아들이 발레를 한다는 사실을 알게 된 순간 불같이 화를 냅니다. 저도 그 장면에서 뜨끔했습니다. 저도 정확히 그런 얼굴을 아이 앞에서 지은 적이 있으니까요.
여기서 짚고 넘어가야 할 개념이 하나 있습니다. 심리학에서는 이를 젠더 고정관념(Gender Stereotype)이라고 부릅니다. 젠더 고정관념이란, 특정 성별에게 사회·문화적으로 기대되는 역할이나 행동 양식을 의미하는데, 문제는 이것이 개인의 진짜 재능과 잠재력을 억누르는 보이지 않는 천장이 된다는 점입니다. 출처: American Psychological Association(APA)에 따르면, 어린 시절 젠더 고정관념에 강하게 노출된 아이들은 자신의 관심사를 숨기거나 포기하는 경향이 높아진다고 합니다.
제가 아들에게 "당장 태권도복 입고 나가"라고 했던 그 순간, 저는 아이의 천장을 직접 내려깔고 있었던 셈입니다. 그 사실이 이 영화를 보고 나서야 비로소 손에 잡혔습니다.
아이의 재능을 목격하는 순간, 세계가 뒤집힌다
제 경험상, 아이의 재능을 '말로' 인정하는 것과 '눈앞에서 직접 목격하는 것'은 완전히 다른 차원의 일입니다. 저는 어느 날 평소보다 일찍 퇴근해 집에 돌아왔고, 방문이 살짝 열린 아들 방에서 음악 소리가 새어 나오는 걸 들었습니다. 몰래 들여다본 방 안에서 아이는 거울을 보며 땀을 비 오듯 흘린 채 섬세하고도 역동적인 춤을 추고 있었습니다.
솔직히 이건 예상 밖이었습니다. 제가 억지로 눌러왔던 그 작은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에너지가 경이로웠습니다. 무엇보다 아이의 표정이 달랐습니다. 억지로 축구장에 밀어 넣었을 때는 단 한 번도 보지 못했던, 펄떡이는 생명력이 거기 있었습니다.
영화 속 빌리도 비슷한 순간을 만들어냅니다. 어느 크리스마스 밤, 텅 빈 체육관에서 아버지를 향해 억눌렸던 열정과 분노를 담아 폭발적으로 춤을 추는 장면입니다. 재키는 그 자리에서 말을 잃습니다. 그리고 조용히 윌킨슨 선생님 집을 찾아가 묻습니다. "비용이 얼마나 들죠?" 이 한 마디가 그 남자의 180도 전환을 압축적으로 보여줍니다.
여기서 '내재적 동기(Intrinsic Motivation)'라는 개념을 짚어볼 필요가 있습니다. 내재적 동기란, 외부 보상이나 강요가 아닌 활동 자체에서 오는 즐거움과 의미에서 비롯된 동기를 말합니다. 발달심리학자 에드워드 데시(Edward Deci)와 리처드 라이언(Richard Ryan)의 자기 결정이론(Self-Determination Theory)은 아이가 스스로 선택한 활동에서 내재적 동기가 발현될 때 성취가 극대화된다는 것을 수십 년에 걸친 연구로 증명했습니다. 출처: Self-Determination Theory(SDT) 공식 사이트
빌리가 발레를 출 때 흘리는 땀과 제 아들이 혼자 추던 춤에서 흐르던 땀은 같은 종류의 것이었습니다. 그 땀의 이름이 내재적 동기라는 걸, 저는 뒤늦게 알았습니다.
- 내재적 동기가 발현된 아이는 외부 강요 없이도 스스로 연습량을 늘린다
- 아이가 '즐거워하는 표정'은 재능의 신호이자 방향을 알려주는 나침반이다
- 부모가 그 순간을 '목격'하는 것이, 말로 하는 지지보다 훨씬 강력한 전환점이 된다
아버지의 변화는 왜 이토록 숭고하고 처절한가
재키가 탄광으로 복귀하는 장면은 제가 이 영화에서 가장 오래 붙잡혀 있었던 장면입니다. 파업 버스에 올라타는 그의 등을 동료 광부들이 "배신자!"라고 외치며 둘러쌉니다.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습니다. 이미 그것을 알고 탄 버스이기 때문입니다. 아들 빌리에게 로열 발레 학교 오디션 기회를 주기 위해, 평생 목숨처럼 지켜온 자신의 이념과 계급적 자존심을 스스로 발로 밟고 올라선 것입니다.
죽은 아내의 유품을 전당포에 맡기는 장면도 마찬가지입니다. 대사가 없습니다. 그냥 보여줍니다. 이 영화가 위대한 이유 중 하나가 바로 여기에 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부모의 희생을 감동적으로 포장하거나 설명하려 들지 않습니다. 그냥 침묵 속의 행동으로 보여주죠.
이 영화를 두고 "재능 있는 아이의 성공기"라고 보는 시각도 있는데, 저는 그렇게 보지 않습니다. 이 영화의 진짜 주인공은 어쩌면 빌리가 아니라 재키입니다. 빌리는 재능이 있었기에 날아오를 수 있었지만, 재키는 가진 것을 스스로 내려놓아야 했기에 더 어려운 도약을 한 사람입니다.
영화의 배경인 1984년 영국 광부 대파업(UK Miners' Strike)은 단순한 노동 분쟁이 아니었습니다. 영국 북부 탄광 마을 공동체의 정체성과 계급 문화가 통째로 흔들리던 역사적 사건이었죠. 그 무게를 짊어진 아버지가, 아들의 춤사위 하나 때문에 자신의 세계관을 산산조각 낸다는 설정은 단순한 드라마가 아닙니다. 그건 인간이 변할 수 있다는 가장 어렵고도 아름다운 증거입니다.
저도 그날 방문을 열고 들어가 굳어버린 아이의 등을 말없이 쓰다듬었습니다. 설명하지 않았습니다. 그냥 "아빠가 몰랐네. 태권도 당장 그만둬라. 춤 학원 등록하러 가자"고 했습니다. 재키만큼 처절하진 않았지만, 제 안에서도 무언가가 조용히 박살 났다는 건 압니다.
자주 묻는 질문
Q. 빌리 엘리어트는 실화인가요?
A. 완전한 실화는 아닙니다. 리 홀(Lee Hall)이 각본을 쓴 픽션이지만, 1984년 영국 광부 대파업이라는 역사적 사실을 배경으로 삼고 있습니다. 실제 그 시기 영국 북부 탄광 마을의 분위기와 계급적 현실을 상당히 충실하게 담아낸 작품으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Q. 빌리가 오디션에서 한 "전기(Electricity)" 대사가 뭔가요?
A. 로열 발레 학교 면접에서 심사위원이 "춤을 출 때 어떤 기분이냐"고 묻자, 빌리가 "모든 게 사라지고 온몸이 변하는 느낌, 마치 전기에 감전된 것 같다"고 답하는 장면입니다. 이 대사는 내재적 동기, 즉 순수한 열정이 어떤 감각인지를 언어로 포착한 명장면으로 손꼽힙니다.
Q. 아이가 좋아하는 걸 지지해줘야 한다는 건 알겠는데, 현실적으로 어떻게 하면 되나요?
A. 이 부분은 부모마다 상황이 다르기 때문에 정답이 없다고 보는 시각도 있습니다. 제 경험상 가장 먼저 해야 할 것은 '목격'이었습니다. 아이가 무엇을 할 때 땀을 흘리면서도 웃고 있는지, 그 장면을 한 번 제대로 보는 것이 어떤 상담이나 책보다 강력한 출발점이 됩니다.
Q. 빌리 엘리어트 뮤지컬과 영화, 뭐가 더 나을까요?
A. 뮤지컬이 더 낫다는 분들도 많고, 영화의 원작적 밀도를 뮤지컬이 대체할 수 없다는 의견도 있습니다. 저는 영화를 먼저 보는 걸 추천합니다. 재키 아버지의 침묵 연기는 영화 매체가 아니면 저 방식으로 전달되기 어렵기 때문입니다.
결론
영화 결말부, 성인이 된 빌리가 매슈 본(Matthew Bourne) 연출의 <백조의 호수> 무대 위에서 힘찬 근육으로 허공을 향해 거대한 도약(Leap)을 하는 마지막 정지 화면은 영화사에 남을 엔딩이라고 생각합니다. 그 도약은 성별의 벽, 계급의 벽, 그리고 아버지의 편견이라는 벽을 모두 통과한 뒤에 가능해진 것이었습니다. 객석에서 그 장면을 올려다보는 재키의 얼굴에는 대사가 없습니다. 필요 없습니다.
저는 이 영화를 본 이후로, 아이의 인생에 낡은 글러브를 억지로 끼우는 팍팍한 코치가 되지 않으려 의식적으로 노력하고 있습니다. 완벽하게 되었다고는 말 못하지만, 적어도 아이가 땀 흘리며 웃고 있는 장면을 마주쳤을 때 혀를 차는 일은 없어졌습니다. 이 영화가 아직 안 당겨진 분이라면, 아이를 생각하며 한 번 보시길 권합니다. 재키를 보다가 자신을 발견하는 순간이 올 수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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