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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레셔널 맨 포스터
영화 '이레셔널 맨'

솔직히 저는 이 영화를 보면서 중간에 꽤 불편했습니다. 주인공 에이브가 저지르는 짓이 끔찍해서가 아니라, 그의 내면 독백이 어딘가 낯설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우디 앨런 감독의 2015년작 <이레셔널 맨>은 살인을 저지르는 철학 교수의 이야기지만, 실제로는 스스로를 '합리적인 어른'이라고 믿는 사람들의 위선을 정면으로 겨냥하는 작품입니다. 결말 포함 리뷰입니다.



살인이 삶의 의미가 된다는 것 — 허무주의와 합리화의 구조

영화 속 에이브 루카스는 처음 등장할 때부터 망가진 사람처럼 보입니다. 불룩한 배, 술 냄새, 무기력한 눈빛. 강단에서는 칸트와 키르케고르를 논하지만 정작 본인의 삶은 텅 비어 있습니다. 이 상태를 철학 용어로 허무주의(Nihilism)라고 부릅니다. 여기서 허무주의란 삶에 본래적인 의미나 가치가 없다고 느끼는 실존적 공허감을 뜻하며, 에이브는 그 극단을 살아가고 있는 인물입니다.

그러다 식당에서 우연히 옆 테이블의 대화를 엿듣습니다. 한 여성이 가정법원 판사 스팽글러에 대해 분통을 터뜨리는 장면입니다. 아이들의 미래를 망치는 나쁜 판사, 아무도 그를 막을 수 없다는 절망. 에이브는 그 순간 결심합니다. "내가 그를 없애면 된다." 이것이 영화의 핵심 전환점입니다.

제가 이 장면에서 정말 소름 돋았던 건 에이브의 표정 변화였습니다. 살인을 결심한 순간부터 그는 눈에 띄게 활기를 되찾습니다. 잘 자고, 잘 먹고, 글도 써지고, 연애도 됩니다. 이 심리 변화를 호아킨 피닉스는 대사 없이 표정과 걸음걸이만으로 체화해 냈는데, 죄책감 없이 생기를 뿜어내는 그 얼굴이 어떤 악당보다 기괴한 페이소스를 자아냈습니다.

에이브가 활용한 독은 시안화물(Cyanide)입니다. 시안화물이란 세포의 산소 이용을 차단해 빠르게 사망에 이르게 하는 맹독으로, 무색 또는 옅은 색을 띠어 음료에 섞어도 눈치채기 어렵다는 특성이 있습니다. 그는 판사가 매주 토요일 조깅 후 마시는 신선한 오렌지 주스에 이 독을 넣는 방식을 선택합니다. 범행 준비 과정에서 그는 실험실 마스터키를 이용해 화학 약품실에 접근하는데, 이 디테일이 나중에 그의 발목을 잡습니다.

에이브의 자기 정당화 논리는 이렇습니다. "나는 무고한 시민을 위해 사악한 권력자를 제거한 것이다. 이건 도덕적 행동이다." 이 사고방식은 철학에서 결과주의(Consequentialism)와 닮아 있습니다. 결과주의란 행위의 옳고 그름을 그 결과로만 판단하는 윤리 이론으로, "더 많은 사람에게 좋은 결과를 낳으면 그 행위는 정당하다"는 논리입니다. 에이브는 이 프레임을 의도적으로, 그러나 왜곡된 방식으로 끌어다 씁니다.

  • 허무주의(Nihilism): 삶의 의미를 상실한 실존적 공허 상태. 에이브의 출발점.
  • 시안화물(Cyanide): 세포 산소 이용을 차단하는 맹독. 에이브가 범행에 사용한 수단.
  • 결과주의(Consequentialism): 행위의 도덕성을 결과로만 판단하는 윤리 이론. 에이브의 자기 정당화 틀.
요약: 에이브는 허무주의적 공허를 채우기 위해 살인을 '도덕적 행위'로 재프레이밍하며, 그 순간부터 오히려 삶의 활력을 되찾는 역설을 보여줍니다.

 

도덕적 자기기만 — 우리는 에이브와 얼마나 다른가

영화가 정말 불편하게 다가온 건 에이브의 논리가 '극단적인 미치광이의 헛소리'로 들리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제 경험상 이런 합리화 구조는 일상에서도 반복됩니다. 회사에서 협력업체를 부당하게 쥐어짜 놓고 "조직을 위한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고 말하는 사람, 누군가의 기회를 가로채고 "원래 현실은 냉혹한 거야"라고 스스로를 다독이는 사람. 저도 솔직히 비슷한 순간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순간마다 제가 얼마나 그럴싸한 언어를 동원했는지를 이 영화가 거울처럼 보여줬습니다.

심리학에서는 이를 인지 부조화 해소(Cognitive Dissonance Reduction)라고 부릅니다. 인지 부조화란 자신의 행동과 신념이 충돌할 때 발생하는 심리적 불편함을 말하며, 인간은 이 불편함을 줄이기 위해 행동을 바꾸는 대신 믿음을 왜곡하는 쪽을 더 자주 선택한다는 것이 연구로 확인되어 있습니다(출처: 미국심리학회(APA)). 에이브는 그 교과서적인 사례입니다.

영화의 결말은 더 통렬합니다. 에이브는 무고한 여성이 자신의 범행으로 인해 용의자로 몰리자, 도덕적 갈등을 느끼는 척하다가 결국 그 여성마저 제거하려 합니다. 강단에서 도덕 철학을 가르치던 사람이, 자신의 생존을 위해 또 다른 무고한 피해자를 만들어낸 것입니다. 지식이 인격을 담보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이보다 냉소적으로 보여준 장면은 흔치 않았습니다.

그리고 결정적인 파국은 어이없을 만큼 사소한 데서 옵니다. 유원지에서 우연히 뽑은 경품 손전등. 에이브가 그 손전등을 갖고 있다는 사실이 학생 질 트레이너에게 노출되며 모든 것이 무너집니다. 제가 이 장면에서 느낀 건 단순한 반전의 쾌감이 아니었습니다. 인간이 아무리 치밀하게 삶을 통제하려 해도, 결국 우연과 부조리가 모든 계획을 뒤집어버린다는 서늘한 진리였습니다. 실존주의 철학자 알베르 카뮈가 말한 부조리(Absurdity) — 즉 인간이 세계에 의미를 부여하려 하지만 세계는 끝내 그 요구에 응답하지 않는다는 개념 — 이 이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 그대로 녹아 있다고 느꼈습니다(출처: Stanford Encyclopedia of Philosophy — Albert Camus).

에이브처럼 살인을 저지르는 사람은 드뭅니다. 하지만 자신의 비겁함을 '합리적 판단'으로, 이기적인 선택을 '어른의 현실주의'로 포장하는 심리는 나이를 먹을수록 점점 정교해집니다. 제가 이 영화를 보고 나서 가장 오래 떠올린 질문은 하나였습니다. "내가 지금 합리적이라고 믿는 그 생각, 정말 이성에서 나온 것인가, 아니면 욕망을 포장한 것인가?"

요약: 에이브의 자기합리화는 인지 부조화 해소라는 보편적 심리 메커니즘의 극단이며, 일상 속 우리의 위선과 구조적으로 닮아 있습니다.

 

자주 묻는 질문

Q. 이레셔널 맨 결말이 어떻게 되나요?

A. 에이브는 판사 암살 이후 자신의 범행을 눈치챈 학생 질을 엘리베이터 샤프트에서 밀어 제거하려 시도합니다. 하지만 오히려 자신이 추락해 사망하는 것으로 영화는 끝납니다. 완벽한 범죄를 자신했던 에이브의 파국이 어이없을 만큼 사소한 실수에서 비롯된다는 점에서 블랙 코미디적 결말입니다.

 

Q. 이레셔널 맨에서 호아킨 피닉스 연기가 왜 소름 돋는다고 하나요?

A. 에이브는 살인을 결심한 순간부터 죄책감 없이 활기를 되찾습니다. 호아킨 피닉스는 이 심리 변화를 대사가 아닌 눈빛, 걸음걸이, 표정만으로 표현합니다. 특히 범행 이후 밝고 여유롭게 웃는 얼굴이 그 어떤 악당 연기보다 불편한 공포감을 줍니다. 지식인의 광기를 이렇게 자연스럽게 체화한 연기는 드물다고 느꼈습니다.

 

Q. 이 영화가 철학적이라는데, 어렵지 않나요?

A. 칸트, 키르케고르, 카뮈 같은 이름이 등장하지만 철학 지식이 없어도 충분히 즐길 수 있습니다. 오히려 철학 용어들은 에이브가 자신의 행동을 포장하는 도구로 쓰일 뿐이고, 영화는 그 위선을 꼬집는 구조입니다. 제 경험상 철학 영화라기보다 심리 스릴러에 가깝게 느껴집니다.

 

Q. 자기합리화가 왜 나이 들수록 심해지나요?

A. 경험이 쌓일수록 자신의 판단을 정당화할 언어와 논리가 정교해지기 때문입니다. 미국심리학회(APA) 연구에 따르면 인지 부조화 해소 능력은 나이와 경험에 비례해 발달합니다. 쉽게 말해, 어릴 때는 잘못을 들키면 그냥 부끄러워하지만, 나이가 들면 그 잘못을 합리적으로 보이게 재포장하는 능력이 생깁니다.

 

결론

<이레셔널 맨>은 살인 스릴러의 외피를 쓴 자기 성찰의 거울입니다. 에이브의 행동은 극단적이지만, 그가 자신의 행동을 정당화하는 방식은 놀라울 만큼 익숙합니다. 이 영화를 보고 나서 제가 가장 오래 남긴 질문은 "나는 얼마나 자주 내 욕망에 철학적 이름을 붙여왔는가"였습니다.

영화를 아직 못 보셨다면, 결말을 알고 봐도 충분히 가치 있는 작품입니다. 반전 자체보다 에이브의 심리 변화 과정이 훨씬 더 깊이 있으니까요. 보고 나서 "나는 최근 어떤 선택을 합리화했는가"라는 질문을 스스로에게 한 번 던져보시는 것, 제 입장에서는 그게 이 영화를 제대로 보는 방법이라고 생각합니다.

참고: https://www.youtube.com/watch?v=wO-N82Gaif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