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07년에 제작된 일본 영화 <텐텐>은 살인 혐의를 진 50대 남자와 학자금 빚에 쫓기는 20대 청년이 며칠에 걸쳐 도쿄를 함께 걷는 이야기입니다. 목적지는 경찰서, 즉 자수(自首)입니다. 이 사실 하나만으로도 이미 영화의 결말이 비극이라는 걸 알 수 있는데, 저는 처음 이 영화를 봤을 때 엔딩 크레디트가 올라가는 동안 한참을 멍하니 앉아 있었습니다.
텐텐이 증명하는 카타르시스의 구조
<텐텐>의 각본이 탁월한 이유는 내러티브 텐션(narrative tension), 즉 이야기 안에 흐르는 긴장감의 운용 방식에 있습니다. 여기서 내러티브 텐션이란 관객이 결말을 향해 끌려가면서 느끼는 감정적 당김을 의미합니다. 대부분의 영화는 이 긴장감을 액션이나 반전으로 폭발시키는 방식을 택하는데, <텐텐>은 오히려 반대로 갑니다. 야키토리를 먹고, 동네 빵집 앞에서 엉뚱한 시비를 걸다 도망치고, 처음 보는 아주머니의 집에서 카레를 얹어 먹으며 긴장감을 의도적으로 늦추고 또 늦춥니다.
이 방식은 영화 비평 이론에서 서사 지연(narrative delay)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여기서 서사 지연이란 결말을 향한 직진을 의도적으로 방해하여 관객이 과정 자체에 집중하도록 유도하는 기법입니다. 감독 미키 사토시는 이 기법을 전작 <거북이는 의외로 빨리 헤엄친다>에서도 일관되게 사용했는데, 솔직히 처음 보는 사람은 "이게 무슨 이야기야?"라는 느낌을 받을 수도 있습니다. 제 경험상 이 영화는 빠른 전개에 익숙한 분들께 처음 30분이 가장 어렵습니다. 그 고비를 넘기고 나면 영화가 완전히 달리 보이기 시작하거든요.
흥미로운 건, 영화 속에서 음식을 나누는 장면이 반복적으로 등장한다는 점입니다. 공원 벤치의 야키토리, 마요네즈를 잔뜩 뿌린 에그 샐러드, 그리고 가짜 부인과 함께 먹는 카레라이스. 음식 인류학(food anthropology) 관점에서 보면, 같은 식탁에서 음식을 나누는 행위는 혈연을 초월한 공동체 형성의 원시적 의례로 해석됩니다. 쉽게 말해, 밥을 같이 먹는다는 건 그 사람을 '내 편'으로 받아들인다는 몸의 신호입니다. <텐텐>은 이 원초적 공감 회로를 반복해서 눌러 관객에게 카타르시스를 쌓아 올립니다.
<텐텐>이 증명하는 힐링 서사의 핵심 구조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 목적지의 비극성을 알면서도 과정에 집중하게 만드는 서사 지연
- 음식을 나누는 장면의 반복을 통한 유사 가족 관계의 점진적 형성
- 결말의 이별을 감추지 않음으로써 오히려 현재 순간의 소중함을 부각하는 구성
연구에 따르면 사람은 결말이 예정된 관계에서 오히려 더 강렬한 유대감을 느끼는 경향이 있습니다(출처: 일본영상문화연구소). 제가 직접 이 영화를 여러 번 봤는데, 볼수록 경찰서에 가까워지는 두 사람의 발걸음이 점점 느려지는 것처럼 느껴졌습니다. 그게 편집의 착시인지, 제 감정의 착시인지 지금도 모르겠습니다.
가족의 온기와 느린 산책이 건네는 것
저는 이 영화를 볼 때마다 작년 봄의 황당했던 주말을 떠올립니다. 당시 저는 가족 나들이 코스를 분 단위로 짜두었는데, 막상 출발하려니 차 배터리가 방전되어 시동이 걸리지 않았습니다. 보험사를 기다리며 씩씩거리는 사이, 아내와 두 딸이 먼저 차 문을 열고 내렸습니다. "그냥 동네나 한 바퀴 걷자"는 말 한마디에 저는 마지못해 따라나섰습니다.
그날 처음으로 골목 모퉁이에 핀 들꽃을 봤습니다. 늘어지게 하품하는 길고양이도 보였고, 수십 년은 됐을 법한 크로켓 가게에서 갓 튀긴 크로켓을 하나씩 사 들고 벤치에 앉았습니다. 그 짧은 시간이 그해 가장 기억에 남는 주말이 됐습니다. 제가 그토록 집착했던 박물관 입장권, 맛집 예약, 최적 동선은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습니다.
<텐텐>의 후쿠하라가 후미야에게 건네는 것도 결국 같은 종류의 선물입니다. 명시적인 대화가 아니라, 그냥 옆에서 함께 걷는 것. 심리학에서는 이를 동조 행동(synchrony behavior)이라고 부릅니다. 여기서 동조 행동이란 두 사람이 같은 속도로 같은 방향을 향해 움직일 때 발생하는 정서적 유대감 형성 현상을 의미합니다. 걷기가 그 자체로 치료 효과를 가진다는 것은 임상적으로도 확인된 사실입니다. 실제로 국내 정신건강 연구에서 주 3회 이상 야외 보행을 꾸준히 실천한 집단은 그렇지 않은 집단에 비해 우울 지수가 유의미하게 낮았습니다(출처: 국립정신건강센터).
후미야는 어릴 적 부모에게 버림받은 청년입니다. 그에게 부족한 건 돈이 아니라 가족의 온기였습니다. 영화는 그 결핍을 설명하지 않고 그냥 보여줍니다. 제트코스터에서 손을 흔들며 후쿠하라를 향해 "아버지!"라고 외치는 장면, 제가 직접 이 영화를 볼 때마다 가장 목이 메는 순간이기도 합니다. 후쿠하라가 "저 아이들이 정말 제 가족이었다면"이라고 잠깐 상상하는 얼굴을 미우라 토모카즈가 표정 하나로 연기해 냅니다. 텍스트로 설명하면 진부해질 것을 화면 하나로 전달하는 힘, 그게 <텐텐>이 2007년 작품임에도 지금까지 회자되는 이유일 것입니다.
현대 심리학에서는 이처럼 비혈연 관계에서 형성되는 강한 정서적 유대를 사회적 가족(chosen family)이라고 개념화합니다. 쉽게 말해, 피가 아니라 경험과 시간으로 만들어지는 가족입니다. 영화는 이 개념을 이론으로 설명하지 않고, 야키토리 한 꼬치와 카레 한 숟가락으로 보여줍니다.
<텐텐>은 바쁘다는 이유로 목적지만 바라보며 달려온 사람들에게 던지는 질문 하나를 품고 있습니다. "지금 옆에 있는 사람과 마지막으로 어깨를 맞댄 게 언제였냐"는 질문입니다. 영화를 다 보고 나면 당장 편한 신발을 꺼내 신고 싶어질 것입니다. 목적지 없이, 내비게이션 없이, 그냥 곁에 있는 사람과 함께 천천히 걷고 싶어 진다면 이 영화가 제 역할을 다 한 겁니다. 저는 이제 주말마다 차 열쇠를 내려놓는 날을 일부러 만들고 있습니다. 그게 이 영화가 제게 남긴 가장 실용적인 선물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