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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등 포스터
영화 '4등'

아이 몸에 남은 멍자국을 보면서도 "4등 하는 것보다 맞는 게 덜 무섭다"고 말하는 엄마. 2015년 개봉한 영화 <4등>의 그 장면은, 제가 몇 년 전 아이를 스파르타식 학원에 밀어 넣으면서 스스로에게 해왔던 말과 너무도 닮아 있었습니다. 그날 영화를 보고 집에 돌아오는 내내 발이 무거웠습니다.



사랑이라는 이름의 폭력 — 광수 코치와 준호 엄마가 공유한 것

영화는 대회만 나가면 4등을 하는 수영 소년 준호를 중심으로 돌아갑니다. 준호의 엄마는 1등에 집착한 나머지 과거 아시아 수영 선수권 대회 우승 경력을 가진 광수 코치를 고용합니다. 광수는 기록을 단축하겠다는 명분으로 준호를 무자비하게 때립니다. 온몸에 피멍이 든 채 출전한 대회에서 준호는 마침내 은메달을 겁니다.

그런데 제가 이 영화를 보며 가장 서늘했던 순간은 광수 코치의 매질이 아니었습니다. 준호 몸의 멍자국을 확인한 엄마가 잠시 고민하다가 아무 말 없이 다음 날도 아이를 수영장으로 보내는 그 장면이었습니다. "난 준호가 맞는 것보다 4등 하는 게 더 무서워"라는 대사는, 정서적 학대(emotional abuse)의 교과서적 장면이나 다름없었습니다. 여기서 정서적 학대란 신체적 폭력 없이도 아이의 자존감과 정신 건강을 훼손하는 언어적·심리적 가해 행위를 말합니다.

광수 코치 역시 단순한 가해자로만 볼 수 없습니다. 그는 과거 천재 선수였지만 코치에게 맞기 싫어 수영을 떠났습니다. 그런데 어른이 된 그는 "그때 맞아서라도 계속했으면 더 성공했을 거야"라며 스스로의 피해 경험을 합리화합니다. 이것이 바로 폭력의 세대 간 전이(intergenerational transmission of violence) 메커니즘입니다. 쉽게 말해, 피해자가 자신의 고통을 '성장의 도구'로 재해석하면서 그 폭력을 다음 세대에 그대로 물려주는 악순환입니다. 출처: 한국청소년상담복지개발원의 연구에 따르면, 체육계 지도자에 의한 폭력 피해 경험은 그 피해자가 지도자가 됐을 때 폭력을 정당화하는 경향을 유의미하게 높이는 것으로 나타납니다.

제가 직접 겪어보니 이 메커니즘은 운동 현장에만 국한되지 않습니다. 저도 한때 "나도 어릴 때 혼나면서 배웠는데"라는 말로 아이를 강압적인 환경에 밀어 넣는 스스로를 정당화했습니다. 40대 가장으로서 성적 지상주의에 흠뻑 젖어 있었고, 동네에서 성적을 잘 올려주지만 폭언으로 유명한 수학 학원에 아이를 억지로 등록시켰습니다. 아이 성적이 오르자 저는 기뻐했지만, 정작 아이는 매일 손톱을 물어뜯기 시작했습니다.

  • 광수 코치: 피해자에서 가해자로 — 폭력의 세대 간 전이를 체현한 인물
  • 준호 엄마: 결과 집착이 정서적 학대로 전환되는 과정을 가장 냉정하게 보여주는 인물
  • 준호 아빠: 언론인이면서도 가정 안의 문제를 직시하지 못하는 평범한 어른의 자화상
요약: 영화 속 폭력은 개인의 악의가 아니라, 성과주의가 만들어낸 구조적 산물임을 영화 <4등>은 정확하게 짚어냅니다.

 

4등 준호의 반란 — 성과주의 바깥에서 발견한 진짜 1등

영화 후반부, 준호는 결국 코치도 엄마도 없이 스스로 수영장으로 돌아옵니다. 누가 시켜서가 아니라 물속이 좋아서. 아무도 지켜보지 않는 그 장면에서 준호는 수면 위로 부서지는 햇빛을 손으로 잡으려 유영합니다. 아름다운 수중 촬영이 담아낸 그 장면은 내재적 동기(intrinsic motivation)의 회복을 시각적으로 구현한 것입니다. 내재적 동기란 외부의 보상이나 처벌이 아닌 활동 그 자체에서 오는 즐거움과 의미에서 비롯된 동력을 말합니다. 심리학자 에드워드 데시(Edward Deci)와 리처드 라이언(Richard Ryan)이 정립한 자기 결정이론(Self-Determination Theory)에서 핵심 개념으로 다루는 이 원리는, 외적 강압이 클수록 내재적 동기가 훼손된다는 것을 일관되게 증명해 왔습니다. (출처: Self-Determination Theory 공식 사이트)

제 경험상 이건 수영이나 운동에만 해당하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어느 날 밤, 화장실에서 몰래 코피를 쏟으며 울고 있는 아이를 발견했습니다. 덜덜 떨며 말하더군요. "아빠, 나 이제 수학이 너무 무섭고 싫어. 차라리 50점 맞고 싶어." 그 순간 머릿속에 벼락이 치는 것 같았습니다. 저는 아이를 훌륭하게 키운다는 명목 아래 사실은 아이의 마음에 피멍을 들이고 있었던 것입니다.

솔직히 이건 예상 밖이었습니다. 성적이 오르면 아이도 자신감을 얻을 거라 믿었거든요. 하지만 강압적 환경에서 얻은 성적은 자신감이 아니라 공포 조건화(fear conditioning)를 남겼습니다. 공포 조건화란 특정 자극(여기선 수학 문제)이 반복적인 불안·처벌 경험과 결합되어 그 자극 자체가 공포 반응을 유발하게 되는 학습 심리 현상입니다. 저는 그날 당장 학원 등록을 취소했습니다. 아이 성적은 한동안 뚝 떨어졌지만, 거실에서 편안하게 책을 읽는 아이의 얼굴이 돌아왔습니다.

영화가 묻는 질문은 결국 하나입니다. 우리는 아이에게 메달을 가르치는 건지, 아니면 헤엄치는 즐거움을 가르치는 건지. 제 경우엔 그 둘을 혼동했고, 그 대가를 아이가 먼저 치렀습니다.

요약: 외적 강압으로 얻은 성과는 내재적 동기를 파괴하고, 준호와 제 아이가 각각 수영과 수학에서 보여준 것처럼 회복은 자율성을 돌려줄 때 비로소 시작됩니다.

 

자주 묻는 질문

Q. 영화 4등 실화인가요?

A. 영화 <4등>은 실화를 직접 원작으로 하지는 않지만, 정지우 감독이 대한민국 체육계와 교육 현장에서 벌어지는 구조적 문제를 취재하고 관찰한 내용을 바탕으로 만든 작품입니다. 특정 사건을 다루지 않았기에 극영화이지만, 제가 보기엔 실제 뉴스 기사보다 현실을 더 정확하게 담아냈습니다.

 

Q. 아이를 엄격하게 훈련시키는 게 무조건 나쁜 건가요?

A. 엄격함 자체가 문제는 아닙니다. 핵심은 그 엄격함이 아이의 자율성과 존엄을 훼손하는 방식인지 여부입니다. 심리학에서는 권위적 양육(authoritative parenting)과 독재적 양육(authoritarian parenting)을 구분하는데, 전자는 높은 기대치와 따뜻한 지지를 함께 제공하는 방식으로 아이의 자기효능감을 높이는 반면, 후자는 통제와 처벌 위주로 오히려 자신감을 떨어뜨리는 결과를 낳는 것으로 연구돼 있습니다. 제 경험상 둘의 차이는 생각보다 훨씬 컸습니다.

 

Q. 4등이라는 제목에 특별한 의미가 있나요?

A. 우리 사회에서 4등은 철저하게 무의미한 숫자입니다. 금·은·동메달 어디에도 들지 못하고, 그렇다고 포기한 것도 아닌 자리. 감독은 바로 그 자리에 있는 아이들을 이 영화의 주인공으로 삼았습니다. 1등만을 인정하는 시스템이 얼마나 많은 아이들을 '의미 없는 존재'로 만들어버리는지를 제목 하나로 응축한 것이라고 저는 해석했습니다.

 

Q. 체육계 폭력 문제, 지금도 심각한가요?

A. 2019년 국가인권위원회의 조사에 따르면 운동선수의 68.5%가 지도자로부터 폭언·폭행을 경험한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이후 스포츠윤리센터가 출범하고 제도 개선이 이루어졌지만, 구조적 문제가 완전히 해소됐다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영화 <4등>이 2015년 작품임에도 여전히 유효하게 읽히는 이유가 거기 있다고 생각합니다.

 

결론

영화 <4등>을 다 보고 나서 제가 한 첫 번째 행동은 아이에게 전화를 건 것이었습니다. "요즘 뭐가 제일 재미있어?"라고 물었습니다. 오랜만에 듣는 질문이었는지 아이가 잠깐 멈칫했습니다. 그 멈칫함이 지금도 마음에 걸립니다.

이 영화는 체육계 고발 영화로 분류되지만, 제 눈에는 대한민국 모든 40대 부모를 향한 조용한 거울입니다. 성과주의라는 집단적 강박 속에서 우리가 아이에게 무엇을 하고 있는지, 사랑이라는 이름 아래 어떤 정서적 폭력을 정당화해 왔는지를 서늘하리만치 정확하게 비춰줍니다. 멍든 은메달보다 물장구를 치며 웃는 아이의 4등이 훨씬 더 빛난다는 것을, 저는 이 영화 덕분에 조금 늦게나마 배웠습니다.

참고: https://www.youtube.com/watch?v=76_tp9a16s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