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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나가다 갑자기 아무것도 안 되는 시절이 있었습니다. 저도 한때 열심히 하던 일이 어느 순간 세상의 흐름과 어긋나버리는 경험을 했는데, 그때 우연히 접한 영화 한 편이 이상하게 오래 머릿속에 남았습니다. 일본 영화 <노어맨>입니다. 실패한 만화가가 강가에서 돌을 주워 팔기 시작하는 이야기인데, 웃기면서도 어딘가 묵직하게 찔려오는 작품이었습니다.
강가의 돌을 파는 남자 — 미장센이 말하는 것
한때 꽤 인기를 끌었던 만화가 스케조는 상업적 타협을 거부하다 결국 업계에서 완전히 잊힙니다. 고물상, 중고 카메라 판매 같은 엉뚱한 사업을 전전하다 모두 실패하고, 급기야 다마강 둔치에 오두막을 짓고 강가에서 주운 돌을 팔기 시작하죠. 저도 처음 이 장면을 봤을 때 솔직히 황당했습니다. '저게 팔린다고?'라는 생각이 먼저 들었으니까요.
그런데 영화는 이 장면을 단순한 웃음거리로 처리하지 않습니다. 여기서 핵심은 미장센(mise-en-scène)입니다. 미장센이란 화면 안에 배치되는 모든 시각적 요소, 즉 인물의 위치, 조명, 소품, 배경 등을 통해 감독이 의도를 전달하는 연출 기법을 의미합니다. 다케나카 나오토 감독은 흑백과 컬러를 오가는 시적인 화면 구성으로 스케조가 돌을 닦고 진열하는 행위 하나하나에 묘한 무게감을 부여합니다. 제가 직접 몇 번을 되감아 봤는데, 그 정성스러운 손놀림이 어느 순간 웃기지 않고 숙연해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이 작품은 전설적인 만화가 츠게 요시하루의 동명 원작을 기반으로 합니다. 츠케 요시하루는 일본 대안 만화(アルタナティブ漫画), 즉 상업적 흐름에서 벗어나 작가 개인의 내면과 일상을 극도로 사실적으로 그려내는 독립적 만화 장르의 선구자로 평가받습니다(출처: 국제교류기금 Japan Foundation). 원작 자체가 이미 작가의 자전적 색채가 짙은 만큼, 영화 역시 그 정서를 고스란히 계승합니다.
아무도 사지 않는 돌을 매일 닦고 늘어놓는 행위. 이것은 상업성을 잃은 예술가가 자신의 예술적 자존심, 즉 외부의 평가와 무관하게 자신만의 고유한 가치를 지키려는 처절하고도 우스꽝스러운 은유로 작동합니다. 세상이 스케조를 쓸모없다고 규정할수록, 그가 돌을 쓰다듬는 손은 더 느리고 진지해집니다. 저는 이 장면에서 꽤 오래 멈췄습니다.
- 흑백과 컬러를 교차하는 촬영으로 현실과 내면의 경계를 시각화
- 곤티티(GONTITI)의 서정적 어쿠스틱 기타 음악이 장면마다 다정한 온도를 부여
- 돌을 닦는 반복적 행위가 예술적 자존심을 지키는 의식(ritual)처럼 연출됨
- 다케나카 나오토 감독이 주연과 연출을 겸하며 인물에 깊은 내면을 이입
실패한 삶의 생명력 — 무능함이 품은 고유한 질감
효율성과 결과만을 기준으로 보면 스케조는 완전한 에러입니다. 돈을 못 버는 남편, 경매에서 오히려 돈을 날리는 아내 모모코, 막일이라도 시작하겠다는 결심이 번번이 무너지는 현실. 솔직히 이건 예상 밖이었습니다. 처음엔 코미디로 보이던 장면들이 반복될수록 점점 가슴이 답답해졌으니까요. '이 사람들은 도대체 언제 나아지는 거지?'라는 조급함이 저 안에서도 올라오더군요.
그런데 그 조급함이 생겨난다는 것 자체가 이 영화의 함정이자 핵심입니다. 영화는 관객에게 끊임없이 묻습니다. '이게 정말 실패인가?' 수석 경매장에서 모모코가 입찰 경쟁에 뛰어들어 가격을 올리다 자신이 낙찰되어 버리는 장면은 웃음과 참담함이 동시에 몰려옵니다. 그럼에도 두 사람은 무너지지 않습니다. 이 끈질김, 이것이 바로 제가 이 영화에서 가장 오래 생각한 생명력이라는 단어와 연결되는 지점입니다.
생명력(vitality)이란 단순히 살아있다는 것이 아니라, 거듭된 실패 속에서도 다음 날 다시 강가로 나가는 힘을 의미합니다. 심리학에서는 이를 회복탄력성(resilience)이라는 개념으로 설명하기도 합니다. 회복탄력성이란 역경이나 외상, 비극적 사건 등으로 인한 극심한 스트레스 앞에서 적응하고 다시 일어서는 능력을 뜻합니다(출처: American Psychological Association). 스케조는 화려한 재기도, 극적인 성공도 없이 그저 하루치의 짐꾼 일을 마치고 돌아옵니다. 그리고 아내는 아무 말 없이 그의 거친 손을 잡아줍니다. 제 경험상 이런 장면이 가장 오래 남습니다.
이 영화가 스케조를 함부로 비웃지 않는다는 점이 제가 이 작품에서 가장 중요하게 받아들인 태도입니다. 그가 파는 강가의 돌은 자본주의 사회에서 아무 교환 가치도 없는 물건이지만, 그에게는 세상의 속도에 휩쓸리지 않겠다는 최후의 보루입니다. 효율이 전부인 세상 속에서 때로는 이런 무용해 보이는 것들이 오히려 숨통을 틔워주기도 합니다. 저도 그 시절 제 나름의 '강가 돌'을 갖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자주 묻는 질문
Q. 영화 노어맨 원작이 따로 있나요?
A. 있습니다. 일본의 전설적인 대안 만화가 츠게 요시하루의 동명 단편 만화가 원작입니다. 츠게 요시하루는 자신의 일상과 내면을 극도로 사실적으로 그려내는 스타일로 일본 만화사에서 독보적인 위치를 차지하는 작가입니다. 원작 만화를 먼저 읽고 영화를 보면 감독이 어떤 장면을 골라 어떻게 해석했는지 비교하는 재미도 있습니다.
Q. 감독이 주연까지 맡은 이유가 있나요?
A. 다케나카 나오토는 배우이자 뮤지션, 감독을 겸하는 다재다능한 예술가입니다. 이 작품은 그의 경이로운 데뷔 연출작으로, 스케조라는 인물에 대한 깊은 공감 없이는 이 역할이 단순한 찌질함으로 흐를 수 있다고 판단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실제로 보면 그 미묘한 균형감이 인상적인데, 감독 본인이 직접 연기했기에 가능했던 것 같습니다.
Q. 수석이 실제로 경매에서 높은 가격에 팔리기도 하나요?
A. 수석(壽石)은 자연 그대로의 형태와 질감, 희귀성에 따라 감정가가 크게 달라지는 전통 감상 예술품입니다. 국내외 수석 협회에서는 정기적으로 감정 경매를 열기도 하며, 희귀한 형태의 수석은 수백만 원 이상에 거래되는 사례도 있습니다. 다만 영화 속 스케조처럼 안목 없이 강가 돌을 무작정 주워다 팔 경우에는 당연히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겠지요.
Q. 이 영화는 어디서 볼 수 있나요?
A. 국내 정식 스트리밍 플랫폼에서 상시 서비스되는 작품은 아니라, 찾아보려면 조금 품이 필요합니다. 일본 예술 영화 특성상 시네마테크나 독립 영화관의 기획전을 통해 만나는 경우가 많습니다. 관심이 생겼다면 국내 아트하우스 상영 일정을 주기적으로 확인해보시거나, 원작 만화를 먼저 접해보시는 것도 좋은 방법입니다.
결론
세상이 규정한 '무능함'과 정면으로 마주하는 영화를 오랜만에 봤습니다. 스케조는 끝내 성공하지 않습니다. 그런데도 이 영화를 보고 나면 이상하게 위로가 됩니다. 제 경험상 이런 감각을 주는 영화는 드뭅니다.
효율과 속도가 전부인 세상에서, 쓸모없어 보이는 것들의 고유한 질감을 다시 한번 생각해 볼 계기를 원하신다면 이 영화를 추천합니다. 원작 츠케 요시하루의 만화부터 시작해도 좋고, 다케나카 나오토의 연출과 연기를 한꺼번에 경험하고 싶다면 영화 본편으로 바로 들어가셔도 충분합니다. "세상의 속도에 발맞추지 못하고 뒤처진 자들의 뒷모습에도, 자신만의 묵직한 질감과 우주가 존재한다"는 이 영화의 시선이, 지금 이 순간 지쳐있는 분들에게 조용한 위로가 되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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