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당신이 매일 먹는 약, 정말 안전하게 개발된 거 맞나요?" 저는 이 영화를 보고 나서 약국에서 처방받은 약 뒷면의 임상시험 승인번호를 한참 들여다본 경험이 있습니다. 2005년 개봉한 '콘스탄트 가드너'는 단순한 스릴러가 아니라, 거대 제약회사가 아프리카 빈민을 대상으로 자행하는 비윤리적 신약 실험의 실체를 파헤친 작품입니다. 영국 외교관 저스틴이 아내 태사의 죽음을 추적하며 밝혀내는 진실은, 우리가 누리는 의료 혜택 이면에 숨겨진 제3세계의 희생을 적나라하게 보여줍니다.
정원을 가꾸는 남자와 세상을 바꾸려는 여자
영화는 케냐 주재 영국 대사관 외교관 저스틴의 일상에서 시작됩니다. 그는 말 그대로 자신의 정원만 돌보는 사람이었습니다. 여기서 '정원(Constant Gardener)'은 단순한 취미가 아니라 세상의 불편한 진실로부터 눈을 돌리는 안전지대를 상징합니다. 저 역시 매일 출퇴근하고 가족과 시간을 보내며 제 울타리 안에서만 평온함을 찾으려 했던 시기가 있었습니다. 뉴스에서 아프리카 기아 문제나 난민 위기를 봐도 "저 사람들은 불쌍하지만, 내가 뭘 할 수 있겠어"라며 채널을 돌려버렸습니다.
그런 저스틴 앞에 나타난 태사는 정반대의 인물입니다. 그녀는 저스틴의 강연 중에 거침없이 질문을 던지며 아프리카에서 벌어지는 제약회사의 만행을 고발합니다. 처음에는 당황하던 저스틴이 태사에게 끌린 이유는, 그녀가 자신이 외면해온 세상의 진실을 직시하는 용기를 가졌기 때문입니다. 두 사람은 연인이 되고 결혼하여 케냐로 향하지만, 저스틴은 여전히 정원 가꾸기에 몰두하고 태사는 혼자 빈민가를 누비며 의료 봉사 활동가 아놀드와 함께 진실을 파헤칩니다.
어느 날 태사는 로키로 향했다가 시신으로 발견됩니다. 경찰은 아놀드와의 불륜 관계를 암시하며 사건을 단순 범죄로 종결하려 하지만, 저스틴은 아내가 남긴 흔적들을 따라가며 그녀가 추적하던 거대한 음모의 실체를 마주하게 됩니다. 제가 이 영화를 보면서 가장 마음이 아팠던 부분은, 태사가 저스틴에게 남긴 편지였습니다. "남편에게 끔찍한 약속을 했지만 지킬 생각이 전혀 없다"며 죄책감을 토로하는 대목에서, 진실을 밝히기 위해 그녀가 얼마나 외롭고 힘든 싸움을 해왔는지 절감했습니다.
다이프락사, 승인되지 않은 신약의 비밀
태사가 추적한 핵심은 'KDH' 제약회사가 개발 중인 결핵 치료제 '다이프락사(Dypraxa)'였습니다. 여기서 다이프락사란 영화 속 가상의 신약 이름이지만, 실제로 신약 개발 과정에서 임상시험(Clinical Trial)은 필수적입니다. 임상시험이란 신약의 안전성과 효능을 검증하기 위해 사람을 대상으로 실시하는 실험 단계를 의미하며, 보통 1상(안전성), 2상(효능), 3상(대규모 검증)으로 나뉩니다(출처: 식품의약품안전처).
문제는 이 임상시험 비용이 천문학적이라는 점입니다. 선진국에서 진행하면 환자 모집부터 보험, 법적 책임까지 막대한 비용이 들기 때문에, 일부 다국적 제약회사들은 규제가 느슨한 제3세계 국가를 타깃으로 삼습니다. 영화 속 KDH는 케냐 빈민가 사람들을 대상으로 다이프락사를 무료로 제공하며 임상시험을 진행했고, 부작용으로 사망자가 속출했지만 이를 철저히 은폐했습니다. 약을 거부하면 의료 혜택 자체를 받을 수 없는 구조였기 때문에, 사람들은 위험을 알면서도 실험 대상이 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저는 이 설정이 단순한 허구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실제로 1996년 나이지리아에서 발생한 화이자의 트로반(Trovan) 임상시험 사건이 대표적인 사례입니다. 당시 화이자는 수막염 유행 중이던 나이지리아에서 미승인 항생제를 어린이들에게 투여했고, 11명이 사망하고 다수가 장애를 입었습니다(출처: 한국보건산업진흥원). 제약회사는 현지 당국에 뇌물을 제공하며 사건을 무마하려 했고, 결국 2009년에야 합의금을 지불했습니다. 영화 속 다이프락사 사건은 바로 이런 현실을 모티브로 한 것입니다.
태사가 작성한 보고서에는 다이프락사의 치명적인 부작용 데이터가 담겨 있었지만, 영국 외교부 고위 관료인 버나드경은 이를 은폐하라고 지시합니다. 그 이유는 KDH의 대표 커티스경이 영국 정계 인사들에게 막대한 뇌물을 제공하며 로비를 해왔기 때문입니다. 정부와 기업이 유착된 구조 속에서, 태사 같은 내부 고발자는 오히려 제거 대상이 되어버렸습니다.
권력과 자본의 유착, 현대판 식민지배
영화는 단순히 한 제약회사의 비리를 고발하는 데 그치지 않습니다. 거대 자본이 국가 권력을 장악했을 때 시스템이 얼마나 부패할 수 있는지를 정조준합니다. 저스틴이 영국으로 돌아가 버나드경을 만나는 장면에서, 버나드는 태사의 보고서 존재를 알고 있으면서도 "우리가 몰랐다면 책임질 필요 없다"며 뻔뻔하게 말합니다. 이것이 바로 '제도적 방관(Institutional Indifference)'입니다. 제도적 방관이란 조직이나 국가가 불법·비윤리적 행위를 인지하면서도 이익을 위해 의도적으로 외면하는 태도를 의미합니다.
저는 이 장면을 보면서 제가 매일 마시는 커피, 입는 패스트패션 의류, 사용하는 스마트폰이 떠올랐습니다. 이 제품들 상당수가 아프리카나 동남아시아의 열악한 노동 환경, 심지어 아동 노동을 통해 만들어졌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하지만 저는 그 '불편한 진실'을 어렴풋이 알면서도, 일상의 편리함을 위해 눈을 감아왔습니다. 영화 속 저스틴의 초기 모습이 바로 저였던 겁니다.
영화는 이러한 구조를 '현대판 식민 지배'로 규정합니다. 과거 제국주의 시대에는 군대를 동원해 식민지를 점령했다면, 현대에는 다국적 기업이 경제력과 로비로 제3세계를 장악합니다. KDH는 케냐 정부에 의료 지원이라는 명분으로 접근했지만, 실상은 규제 없는 실험장으로 활용했습니다. 케냐 경찰조차 제약회사 편에 서서 태사를 제거하는 데 협조했으니, 이것이 식민 지배가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영화 후반부, 저스틴은 남수단까지 찾아가 KDH의 현지 책임자 로비에를 만납니다. 로비에는 "제약회사를 비난하는 건 쉽지만, 아프리카 사람들은 어차피 에이즈와 말라리아로 죽을 운명"이라며 냉소적으로 말합니다. 이 대사야말로 극단적 자본주의의 민낯을 보여주는 핵심입니다. 사람의 목숨보다 주가와 이윤을 최우선으로 두는 시스템, 그리고 그 시스템을 떠받치는 권력의 방조. 저는 이 장면에서 분노보다는 무력감을 느꼈습니다. 개인이 이런 거대한 구조에 맞서는 것이 얼마나 무모한 일인지 실감했기 때문입니다.
저스틴의 선택, 그리고 우리가 해야 할 일
결국 저스틴은 태사가 남긴 증거를 세상에 공개하기로 결심합니다. 그는 버나드경이 태사에게 보낸 은폐 지시 편지를 영국 언론에 전달하고, 태사가 죽음을 맞았던 투르카나 호수로 향합니다. 저스틴은 자신도 태사처럼 살해당할 것을 알면서도, 진실을 밝히는 것이 아내의 뜻을 완성하는 길이라 믿었습니다. 영화 마지막, 저스틴의 장례식에서 그의 편지가 공개되고 버나드의 비리가 세상에 폭로됩니다. KDH는 결국 기록적인 이익을 냈고, 다이프락사는 다른 이름으로 계속 실험되고 있다는 자막이 흐릅니다.
이 결말이 씁쓸한 이유는, 개인의 희생으로 진실이 밝혀졌지만 시스템은 여전히 작동한다는 점입니다. 저는 영화를 보고 나서 "그래서 나는 뭘 해야 하는가"라는 질문에 오래 머물렀습니다. 일부에서는 "이런 영화를 봐도 세상은 안 바뀐다"고 냉소할 수 있지만, 저는 다르게 생각합니다. 태사와 저스틴 같은 사람들이 목숨을 걸고 싸웠기 때문에, 적어도 우리는 이 문제를 '알게' 되었습니다. 무지는 방관의 핑계가 되지만, 인지한 이상 선택의 책임은 우리에게 넘어옵니다.
저는 이후 제가 소비하는 제품의 생산 과정에 조금 더 관심을 갖게 되었습니다. 공정무역 커피를 선택하고, 패스트패션 대신 중고 의류를 구매하려 노력합니다. 거창한 변화는 아니지만, 적어도 제 소비가 누군가의 착취로 이어지지 않도록 경계하게 되었습니다. 물론 이것만으로 충분하지 않습니다. 제약회사의 비윤리적 임상시험을 막기 위해서는 국제 사회의 강력한 규제와 감시가 필요하고, 우리는 그런 정책을 요구하는 목소리를 내야 합니다.
'콘스탄트 가드너'는 불편한 영화입니다. 보고 나면 마음이 편치 않고, 내가 누리는 것들에 대해 죄책감마저 느끼게 만듭니다. 하지만 바로 그 불편함이 이 영화의 가치입니다. 저스틴처럼 정원만 가꾸며 살 것인가, 태사처럼 세상의 불의에 맞설 것인가. 그 선택은 결국 우리 각자의 몫입니다. 저는 적어도, 더 이상 채널을 돌리지 않기로 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