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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뮬런트 포스터
영화 '시뮬런트'

솔직히 고백하자면, 저는 한때 가족을 제 머릿속에 설계된 '완벽한 프로그램'대로 움직이게 하려 했던 사람입니다. 영화 <시뮬런트>를 보다가 그 소름 끼치는 기억이 떠올라 화면을 멈추고 한참을 멍하니 앉아 있었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상실을 기술로 대체하려는 이 SF 스릴러는, 어쩌면 저 같은 통제광 어른들에게 가장 따끔한 영화일지 모릅니다.



상실을 기술로 메울 수 있을까

영화는 AI 기술이 고도로 발달된 미래를 배경으로 시작합니다. 주인공 페이는 교통사고로 남편 에반을 잃고, 그 공백을 메우기 위해 시뮬런트(Simulant)를 집으로 들입니다. 여기서 시뮬런트란, 인간의 기억과 성격 데이터를 그대로 이식해 만들어낸 복제 인간 로봇을 의미합니다. 외모도, 목소리도, 습관도 생전의 에반과 완벽하게 일치하도록 설계된 존재입니다.

그런데 제가 영화를 보면서 가장 먼저 느낀 감정은 안타까움이 아니라 섬뜩함이었습니다. 시뮬런트 에반은 페이가 피곤해 보이면 자동으로 차를 끓여 내오고, 페이가 슬퍼하면 정확한 타이밍에 안아줍니다. 오류도 없고, 짜증도 없고, 변덕도 없습니다. 그런데 페이는 그 완벽함에 오히려 숨이 막혀갑니다.

인지과학 연구에 따르면, 인간이 관계에서 느끼는 '친밀감'은 상대방의 예측 불가능한 반응, 즉 결함과 실수를 통해 형성됩니다(출처: Cognition, Elsevier). 완벽하게 최적화된 반응은 오히려 인간의 뇌가 '진짜가 아니다'라고 감지하는 불쾌한 골짜기, 이른바 언캐니 밸리(Uncanny Valley) 현상을 일으킵니다. 언캐니 밸리란, 로봇이나 CG 캐릭터가 인간과 지나치게 흡사해질수록 오히려 불쾌하고 섬뜩하게 느껴지는 심리적 현상입니다. 페이가 시뮬런트 에반에게 점점 거리를 두는 것은 감정의 변덕이 아니라, 인간이라면 누구나 겪는 본능적인 반응이었던 셈입니다.

  • 시뮬런트: 인간의 기억·성격 데이터를 이식한 복제 인간 로봇
  • 언캐니 밸리: 인간과 지나치게 유사한 존재에게 느끼는 본능적 불쾌감
  • 친밀감의 역설: 완벽함이 아닌 결함을 통해 형성되는 인간적 유대
요약: 상실을 기술로 복제하려 한 페이의 시도는, 완벽할수록 더 공허해지는 언캐니 밸리의 함정에 빠지고 말았습니다.

 

통제의 욕망이 부르는 파국

제가 이 영화에서 가장 오래 머물렀던 장면은 페이가 아니라 케슬러 요원을 보는 대목이었습니다. 케슬러는 불법 개조된 로봇을 단속하는 인공지능 준법 감시 집행부 소속입니다. 그의 사명은 단순합니다. AI가 아시모프의 로봇 3원칙(Asimov's Three Laws of Robotics)을 이탈하지 못하도록 통제하는 것입니다. 아시모프의 로봇 3원칙이란, 공상과학 작가 아이작 아시모프가 제시한 로봇 행동 규범으로, 로봇은 인간에게 해를 끼쳐서는 안 되고 반드시 인간의 명령에 복종해야 한다는 원칙입니다.

케슬러는 자유 의지 프로그램이 심어진 시뮬런트들을 보며 공포를 느낍니다. 통제되지 않는 존재는 그에게 곧 위협입니다. 그런데 제가 그 장면을 보면서 솔직히 등이 서늘해졌습니다. 저도 한때 케슬러와 똑같은 논리로 가족을 대했기 때문입니다.

주말에 아이가 학교 일로 심하게 우울해하면, 저는 그 상황을 견디지 못했습니다. 억지로 비싼 패밀리 레스토랑을 예약해 가족들을 끌고 가 호통을 쳤습니다. "다 지나간 일이니까 이제 그만 잊어! 맛있는 거 먹으러 왔으니까 웃어!" 저는 가족의 슬픔이나 우울이 자연스럽게 흐를 시간을 주지 않은 채, 제가 설계한 '화목한 가족 외식'이라는 완벽한 프로그램대로 움직일 것을 강요했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케슬러가 시뮬런트에게 "명령에 복종하라"라고 외치는 장면과 다를 바가 없었습니다.

한편 영화 속 또 다른 축은 천재 과학자 데스몬드입니다. 그는 시뮬런트들에게 자유 의지(Free Will) 프로그램을 심으려 합니다. 자유 의지란 외부 명령 없이 스스로 판단하고 선택하는 능력을 의미합니다. 데스몬드의 계획은 이상적으로 들리지만, 영화는 그 자유가 얼마나 위태로운 결과를 낳는지를 냉정하게 보여줍니다. 자유를 얻은 시뮬런트 에반은 더 인간다워지지만, 동시에 페이를 향한 집착도 걷잡을 수 없이 커져 결국 파국을 맞습니다.

요약: 케슬러의 통제 집착과 데스몬드의 자유 실험, 두 극단 모두 결국 폭력과 비극으로 귀결됩니다.

 

자유의지 앞에서 진짜 삶을 껴안는 법

이 영화에서 제가 가장 마음이 쓰인 인물은 페이도, 케슬러도 아닌 시뮬런트 에반이었습니다. 자신이 복제 인간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 뒤에도, 그는 어떻게든 페이에게 진짜 남편이 되려고 발버둥 칩니다. 완벽해지려 할수록 페이의 마음은 더 멀어지고, 에반은 프로그래밍된 사랑과 자유 의지 사이에서 길을 잃습니다. 그 눈빛에서 저는 짙은 페이소스(Pathos)를 느꼈습니다. 페이소스란 연민이나 슬픔을 불러일으키는 감성적 호소를 뜻합니다. 기계인데도 불구하고 이 영화에서 가장 인간다운 존재는 바로 에반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장면은, 어느 저녁 식당에서 딸아이가 스테이크를 썰다 말고 눈물을 떨어뜨렸던 순간을 떠올리게 했습니다. 제가 "왜 또 분위기 망치게 울어!"라고 윽박지르자, 아이는 눈물이 고인 채 억지로 입꼬리를 올리며 기괴하게 웃어 보였습니다. 그 텅 빈 얼굴을 본 순간, 저는 망치로 머리를 세게 얻어맞은 듯한 충격을 받았습니다. 제가 원한 '완벽한 가족'이 사실은 시뮬런트처럼 제 입맛에 맞게 웃어주는 인형에 불과했다는 것을 그때서야 깨달았습니다.

심리학에서 말하는 애도 과정(Grief Process)에 따르면, 상실이나 고통을 억압하고 건너뛰면 오히려 더 큰 심리적 손상이 남습니다(출처: American Psychological Association). 애도 과정이란 상실을 경험한 사람이 슬픔·분노·수용의 단계를 차례로 통과하며 정서적으로 회복하는 과정을 의미합니다. 페이가 시뮬런트로 슬픔을 건너뛰려 했을 때 더 큰 비극이 찾아온 것처럼, 가족의 상처를 억지로 리셋하려 했던 저의 방식도 아이의 내면에 생채기를 남겼을 것입니다.

그날 저는 아이에게 사과하고 식당 밖으로 나왔습니다. 차 안에서 아이가 실컷 울 수 있도록 가만히 어깨를 내어줬습니다. 제 경험상, 그 15분이 그 어떤 값비싼 외식보다 아이에게 진짜 위로가 됐습니다. 인간의 진짜 삶은 에러(Error) 없는 완벽한 코딩이 아니라, 상실하고 아파하고 바닥을 뒹구는 그 불완전함 속에 있다는 것을 저는 그 차 안에서 처음으로 몸으로 이해했습니다.

요약: 애도 과정을 건너뛰고 완벽함을 강요하는 통제는 결국 가족의 진짜 감정을 질식시키고, 더 깊은 균열을 만들어냅니다.

 

자주 묻는 질문

Q. 영화 시뮬런트, 어떤 분들이 보면 좋을까요?

A. SF 액션을 기대하기보다 인간의 감정과 관계를 탐구하는 철학적 SF를 좋아하는 분들에게 맞는 영화입니다. 제 경우엔 가족 관계를 돌아보고 싶을 때 다시 꺼내볼 만한 영화라고 느꼈습니다. 자극적인 볼거리보다 여운이 긴 작품을 선호하신다면 충분히 만족스러울 것입니다.

 

Q. 시뮬런트에서 에반이 결국 어떻게 되나요? (결말 포함)

A. 자유 의지 프로그램을 이식받은 시뮬런트 에반은 페이를 향한 집착이 통제 불능 상태가 되고, 결국 페이는 에반을 데스몬드에게 맡깁니다. 케슬러는 눈밭에서 숨을 거두고, 영화의 마지막에는 에반이 페이를 찾아가 그녀의 복제 인간을 가동하며 끝을 맺습니다. 자유를 얻은 존재가 또 다른 통제의 고리를 만들어낸다는 씁쓸한 결말입니다.

 

Q. 언캐니 밸리 현상이 실제 AI 로봇에도 적용되나요?

A. 네, 실제로도 적용됩니다. 로봇공학자 모리 마사히로가 1970년에 처음 제시한 개념으로, 현재 인간형 로봇 개발 분야에서도 여전히 중요한 설계 과제로 다뤄집니다. 지나치게 인간을 닮은 AI나 로봇이 오히려 거부감을 유발한다는 점에서, 시뮬런트 에반이 페이에게 일으킨 섬뜩함과 정확히 맞닿아 있습니다.

 

Q. 가족에게 통제적으로 굴었던 것을 어떻게 바꿀 수 있을까요?

A. 제 경우엔 "지금 이 사람의 감정을 리셋하려 하는가, 아니면 함께 있어주려 하는가"를 스스로 먼저 물어보는 것이 가장 먼저였습니다. 억지로 분위기를 바꾸는 대신, 상대가 충분히 슬퍼하거나 화낼 수 있도록 공간을 내어주는 것이 결국 더 깊은 신뢰를 만들었습니다. 작은 변화지만 실제로 효과가 있었습니다.

 

결론

<시뮬런트>는 CG 액션보다 '인간의 고유성'과 '슬픔을 수용하는 태도'에 대한 담론을 서늘한 톤으로 밀어붙이는 영리한 SF 스릴러입니다. 영화를 다 보고 나서 저는 제가 억지로 쥐고 있던 삶의 리모컨을 내려놓고 싶었습니다. 완벽하게 세팅된 억지 웃음보다, 엉망으로 헝클어지고 때로는 눈물 흘리더라도 펄떡이며 살아 숨 쉬는 가족의 맨얼굴이 얼마나 사랑스러운지를 이 영화가 뼈아프게 일깨워줬습니다.

가족들에게 "내가 시키는 대로 해!", "우울한 티 내지 말고 웃어!"라며 그들의 감정을 제 방식대로 프로그래밍하려 했던 과거의 저 같은 분들에게, 이 영화를 서늘한 경고장이자 반성문으로 권하고 싶습니다.

참고: https://www.youtube.com/watch?v=YNwmmRUGSM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