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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여자들 포스터
영화 '어떤 여자들'

저도 처음엔 이 영화를 보면서 "이게 무슨 이야기인가" 싶었습니다. 사건도 없고, 눈물 흘리는 장면도 없고, 그냥 몬태나의 허허벌판에 세 여자가 각자 살아가는 모습만 보여줍니다. 그런데 영화가 끝나고 한참 뒤에도 목장 일꾼 제이미의 눈빛이 머릿속에서 지워지지 않았습니다. 그 눈빛이 왜 그렇게 오래 남는지를 생각하다가, 저는 어느 늦은 밤 아이의 손에 쥐여 있던 낡은 열쇠고리를 떠올렸습니다. 말 대신 침묵으로 마음을 건네는 방식, 이 영화는 그걸 정면으로 바라봅니다.



침묵의 언어 — 말해도 듣지 않는 세계에서

혹시 이런 경험이 있으신지요. 분명히 옳은 말을 했는데, 상대가 다른 사람 입으로 똑같은 말을 들을 때까지 인정하지 않는 경우 말입니다. 저는 영화 속 변호사 로라를 보면서 그 감각이 선명하게 되살아났습니다.

켈리 라이카트 감독의 2016년작 <어떤 여자들(Certain Women)>은 미국 몬태나주의 황량한 겨울을 배경으로, 각자의 고독을 조용히 껴안고 살아가는 세 여성의 이야기를 옴니버스 형식으로 담아냅니다. 여기서 옴니버스 형식이란, 독립된 세 개의 단편이 느슨하게 연결되며 하나의 영화를 이루는 구조를 말합니다. 극적인 사건 없이도 하나의 세계를 완성할 수 있다는 걸 이 영화는 증명합니다.

첫 번째 이야기에서 변호사 로라는 의뢰인 풀러에게 수개월 동안 같은 말을 반복합니다. 소송을 걸 수 없는 상황이라고, 이미 합의서에 서명했다고. 하지만 풀러는 끝내 듣지 않습니다. 그러다 로라의 남성 동료가 똑같은 말을 하자, 풀러는 단번에 수긍합니다. 로라의 표정에서 분노보다 깊은 피로감이 읽힙니다. 저도 직접 보면서 솔직히 이건 예상 밖이었습니다. 이렇게까지 노골적으로 그 순간을 포착하는 영화가 있을 줄은 몰랐습니다.

두 번째 이야기의 지나는 새 집을 짓기 위해 개척 시대의 사암(砂巖, sandstone)을 구하려 합니다. 사암이란 모래 알갱이가 굳어 만들어진 퇴적암으로, 이 영화에서는 땅과 세월의 기억이 깃든 물성(物性)을 상징합니다. 지나는 혼자 그 돌을 찾아 협상까지 해냈지만, 정작 남편 라이언은 엘버트 노인의 감정을 먼저 배려하며 주도권을 슬쩍 가져갑니다. 지나가 감사의 인사로 손을 흔들었지만 돌아오는 인사는 없습니다. 그 짧은 장면 하나가 그녀의 가족 안에서의 위치를 아주 조용히, 그러나 정확하게 드러냅니다.

라이카트 감독은 미장센(mise-en-scène), 즉 화면 안에 배치되는 모든 시각적 요소들을 대사의 대체재로 활용합니다. 차창에 맺힌 성에, 아무도 듣지 않는 식탁 위의 대화, 손을 흔들어도 받아주지 않는 공기. 이 영화는 그런 순간들이 쌓여야 비로소 보이는 균열을 이야기합니다.

  • 로라: 법적으로 옳은 말을 해도 성별 때문에 무시당하는 현실을 묵묵히 견딤
  • 지나: 가족을 위해 헌신하지만 가족 안에서 정작 보이지 않는 존재가 됨
  • 두 이야기 모두 '말해도 전달되지 않는' 고독을 공유함

영화 연구자들은 라이카트의 작품 세계를 '최소주의 리얼리즘(minimalist realism)'이라 부릅니다. 최소주의 리얼리즘이란 과장 없이 일상의 표면을 그대로 포착함으로써 오히려 그 아래의 감정 구조를 더 선명하게 드러내는 미학적 전략을 말합니다. 제가 이 영화를 처음 봤을 때 '아무것도 안 일어난다'라고 느꼈던 게 사실 이 전략 때문이었다는 걸, 두 번째 볼 때야 깨달았습니다(출처: The Criterion Collection).

요약: 말해도 듣지 않는 세계에서 세 여성이 감내하는 침묵의 무게를, 라이카트는 미장센과 최소주의 리얼리즘으로 조용히 포착한다.

 

고독과 릴리 글래드스톤 — 말 없이 전부를 말하는 연기

세 이야기 중 가장 오래 마음에 남는 건 뭐냐고 묻는다면, 저는 주저 없이 제이미의 이야기라고 답합니다. 그 이유의 절반은 릴리 글래드스톤이라는 배우 때문입니다.

목장 일꾼 제이미는 벨그레이드의 외딴 목장에서 말을 돌보며 하루하루를 보냅니다. 대화 상대가 없는 생활이 얼마나 지속되었는지, 그녀는 야간 강좌를 진행하러 먼 곳에서 온 교육법 강사 베스에게 거의 즉각적으로 이끌립니다. 이 끌림은 낭만적인 감정이기도 하지만, 그보다 먼저 '누군가와 연결되고 싶다'는 원초적인 갈망에 가깝습니다. 인간의 사회적 고립(social isolation)이 어떤 형태로 발현되는지를, 이 영화는 제이미를 통해 가장 날것으로 보여줍니다. 사회적 고립이란 일상 속 인간 관계망이 현저히 줄어들어 정서적 연결 욕구가 채워지지 않는 상태를 말합니다.

제이미는 베스가 수업을 마치면 함께 밥을 먹고, 다음 수업을 기다리고, 결국 리빙스턴까지 무작정 찾아갑니다. 그녀가 알고 있는 건 베스의 이름과 직업뿐입니다. 저는 제이미가 그 도시에서 길을 물으며 낯선 사무실 문을 두드리는 장면을 보면서 마음이 먹먹했습니다. 저도 경험상 이건 좀 다릅니다. 어떤 간절함은 논리가 아니라 몸이 먼저 움직이게 만듭니다.

릴리 글래드스톤의 연기는 제가 직접 보면서 경험한 것 중 가장 독보적인 종류였습니다. 내러티브 영화(narrative film)에서 배우의 역할은 보통 대사로 정서를 전달하는 것인데, 글래드스톤은 대사 없이, 심지어 표정 변화도 최소화한 채 눈빛 하나로 제이미의 내면 전부를 관객에게 건넵니다. 내러티브 영화란 이야기의 흐름을 따라 인물과 사건이 전개되는 전통적 극영화 형식을 말합니다. 2024년 그녀가 <킬러스 오브 더 플라워 문>으로 골든글로브 여우주연상을 수상했을 때, 저는 이 영화의 제이미가 그 모든 것의 출발점이었다는 생각을 했습니다(출처: Golden Globe Awards).

그리고 저는 제이미의 그 눈빛을 보다가 아이를 떠올렸습니다. 한창 효율만 따지던 40대 시절, 저는 아이가 서재 문가를 서성이면 "원하는 게 있으면 똑바로 말해"라고 쐐기를 박았습니다. 그런데 어느 밤, 소파에서 잠든 아이 손에 제가 예전에 무심코 예쁘다고 했던 낡은 열쇠고리가 꼭 쥐여 있었습니다. 아이는 말 대신 기다림으로 마음을 건네고 있었던 겁니다. 제이미가 베스를 향해 어떤 부담도 주지 않으려 말없이 말을 끌고 나타났던 것처럼. 저는 그날 열쇠고리를 빼내는 대신 그 작은 손을 두 손으로 감싸 쥐고 한참을 앉아 있었습니다. 영화가 가르쳐준 게 있다면 바로 그 자세였습니다.

요약: 릴리 글래드스톤은 대사 없이 눈빛만으로 고독과 간절함을 전달하며, 제이미의 이야기는 침묵으로 마음을 건네는 방식이 얼마나 진실에 가까운지를 보여준다.

 

자주 묻는 질문

Q. 어떤 여자들, 스토리가 너무 잔잔해서 지루하지 않나요?

A. 솔직히 처음 20분은 "이게 맞나?" 싶을 수 있습니다. 제가 첫 번째 볼 때도 그랬습니다. 하지만 이 영화는 사건이 아니라 감각을 쌓아가는 방식으로 작동합니다. 끝나고 나서 한참 뒤에 무언가가 남는다면, 그게 이 영화가 의도한 바입니다.

 

Q. 릴리 글래드스톤이 이 영화에서 대사가 거의 없다는데, 그래도 연기가 느껴지나요?

A. 오히려 대사가 없기 때문에 더 강렬하게 느껴집니다. 제이미가 베스를 바라볼 때의 눈빛 하나가 긴 독백보다 훨씬 많은 것을 전달합니다. 제가 직접 보면서 경험한 것 중에 이렇게 조용히 무너지는 연기는 흔치 않았습니다.

 

Q. 이 영화가 페미니즘 영화라고 볼 수 있나요?

A. 페미니즘 영화라는 틀을 씌우기보다는, 일상에서 소리 없이 지워지는 목소리들에 관한 영화라고 보는 게 더 정확할 것 같습니다. 로라의 조언이 무시당하고, 지나의 노력이 묻히는 장면들은 특정 이념을 넘어 보편적인 소외감으로 읽힙니다.

 

Q. 켈리 라이카트 감독의 다른 작품도 비슷한 분위기인가요?

A. 네, 라이카트 감독은 <미드나잇 카우보이> 식의 극적 서사보다 일상의 질감을 포착하는 작품들을 꾸준히 만들어왔습니다. <퍼스트 카우>나 <웬디 앤 루시>도 비슷한 결을 공유하니, <어떤 여자들>이 마음에 들었다면 같이 보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결론

<어떤 여자들>은 보고 나서 바로 대단하다는 감정이 오는 영화가 아닙니다. 며칠이 지나도 제이미의 눈빛이 어딘가에서 떠오르고, 손을 흔들어도 받아주지 않던 그 장면이 문득 생각날 때, 이 영화가 얼마나 깊이 파고들었는지를 비로소 실감하게 됩니다.

저는 이제 '왜 말로 표현하지 않느냐'고 다그치는 어른이 되지 않으려 합니다. 누군가가 서성이고, 침묵하고, 말없이 기다리는 방식으로 마음을 건넬 때, 그 고요한 언어를 먼저 알아채는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이 영화가 제게 남긴 건 바로 그 자세입니다.

참고: https://www.youtube.com/watch?v=0M_wzE39Myc