솔직히 말씀드리면, 저는 이 영화를 보면서 한 번도 울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영화가 끝나고 한참 동안 화면을 멍하니 바라봤습니다. 시한부 선고를 받은 주인공이 치료도 미루고 낡은 모터사이클을 몰고 서쪽으로 달려 나가는 그 첫 장면에서, 제 가슴 어딘가가 묘하게 덜컹했기 때문입니다.정해진 출구를 지나쳐 본 적 있으신가요영화 속 국어 교사 벤은 말기암 진단을 받은 날, 병원 대신 중고 모터사이클 판매점으로 걸어 들어갑니다. 그리고 아무런 계획도 없이 캐나다 토론토에서 서쪽 끝 태평양을 향해 달리기 시작하죠. 약혼녀 사만다의 눈물도, 가족의 만류도, 세상의 상식적인 압박도 모두 뒤로한 채.저도 비슷한 충동을 경험한 적이 있습니다. 몇 해 전 끝없는 실적 압박과 대출 이자, 아이들 교육비로 숨이 턱턱 막히던 어..
7악장을 단 한 번의 쉼도 없이 연주해야 하는 곡이 세상에 있습니다. 베토벤 현악 4중주 14번(Op. 131)이 바로 그렇습니다. 저는 이 사실을 영화 한 편을 보다가 처음 알았고, 그 순간 얼마 전 아내와 핏대를 세웠던 씁쓸한 주말 거실이 떠올랐습니다.불협화음 — 25년의 균열은 어떻게 시작되는가결성 25주년을 앞둔 현악 4중 주단 '푸가(Fugue)'에서 첼리스트 피터가 파킨슨병 진단을 받습니다. 여기서 파킨슨병이란 도파민 신경세포가 서서히 손상되면서 손 떨림, 경직 등의 운동 장애가 나타나는 신경퇴행성 질환입니다. 활로 현을 당기는 행위가 생명인 연주자에게 이 진단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느껴집니다.그런데 정작 영화에서 더 날카롭게 다가온 건 피터의 병보다, 그 소식이 터뜨린 ..
솔직히 저는 오랫동안 '효율성'이 미덕인 줄로만 알았습니다. 40대 직장인으로 살다 보면 어느 순간 사람도, 시간도, 심지어 가족까지도 생산성의 잣대로 재는 자신을 발견하게 됩니다. 일본 영화 〈앙: 단팥 인생 이야기〉는 그런 저를 조용히, 그러나 아주 단단하게 때린 작품이었습니다.공장제 앙금과 효율주의의 민낯영화의 주인공 센타로는 도라야키 가게를 운영하면서도 정작 단팥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빚을 갚는다는 이유 하나로 값싼 공장제 앙금(시판 팥 앙금)을 써서 기계적으로 도라야키를 찍어냅니다. 여기서 공장제 앙금이란 대량 생산 시스템에서 균일한 품질로 만들어진 규격화된 식재료를 의미합니다. 효율은 극대화되지만 그 과정에서 어떤 정성이나 고유한 맛은 사라집니다.제가 이 장면에서 멈칫했던 건, 그 모습이 너무..
사춘기 아이와 거실에서 말다툼을 벌이고 나서, 방문 쾅 소리가 사라진 조용한 집 안에 혼자 앉아 본 적 있으신가요. 저는 그 순간이 영화 한 편을 보고 나서야 비로소 이해가 됐습니다. 딸을 잃은 어머니의 이야기를 담은 영화 쓰리 빌보드(Three Billboards Outside Ebbing, Missouri)를 보고 나서입니다.정당한 분노가 광고판 세 개가 되는 순간미국 미주리주의 작은 시골 마을. 딸 앤젤라가 강간당하고 불에 타 살해된 지 7개월이 지났지만 경찰 수사는 제자리걸음입니다. 어머니 밀드레드는 마을 외곽의 낡은 광고판 세 개를 빌려 경찰서장 윌러비의 무능을 새빨간 글씨로 공개적으로 고발합니다.밀드레드의 분노는 누가 보아도 100% 정당했습니다. 저도 처음엔 그녀 편이었고, 마음속으로 박수를..
퇴근 후 겨우 정돈해 둔 거실이 아내와 딸들의 이불 텐트로 박살 나 있던 그날, 저는 이 영화를 다시 떠올렸습니다. 영화 모짜르트와 고래는 아스퍼거 증후군을 가진 두 사람의 로맨스를 다루는데, 단순히 따뜻한 사랑 이야기로 소비하기에는 너무 뾰족하고 너무 정직한 영화입니다.아스퍼거 증후군, 장애인가 다름인가아스퍼거 증후군(Asperger Syndrome)이라는 말을 처음 들었을 때 막연히 '자폐의 일종'이라고만 알고 있던 분들이 많을 겁니다. 저도 그랬습니다. 여기서 아스퍼거 증후군이란 자폐 스펙트럼 장애(ASD, Autism Spectrum Disorder)의 한 유형으로, 지적 능력과 언어 발달은 정상 범주에 있지만 사회적 상호작용과 비언어적 의사소통에 어려움을 겪는 신경발달 특성을 말합니다. 쉽게 말..
성공을 향해 달려가는 것이 삶의 의무라고 믿으셨나요? 저도 그렇게 살았습니다. 그런데 영화 한 편이 그 믿음을 조용히 흔들었습니다. 천재 바이올리니스트가 데뷔 무대를 버리고 사라진 이유가 단순한 도망이 아니라, 죽어간 자들의 이름을 기억하기 위한 선택이었다는 것. 그 진실이 뼈아프게 다가온 것은 제가 직접 겪은 상실의 경험이 있었기 때문입니다.천재는 왜 데뷔 무대를 버렸는가1951년 런던. 촉망받는 바이올리니스트 도비들의 데뷔 콘서트(debut concert)를 보기 위해 사회 각층의 유명 인사들이 공연장을 가득 채웠습니다. 데뷔 콘서트란 신인 연주자가 처음으로 대중 앞에 서는 무대로, 연주자의 일생을 통틀어 가장 중요한 순간으로 꼽힙니다. 그런데 도비들은 그 자리에 나타나지 않았습니다.35년 후 친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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