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무 살 가을, 어머니가 시장 일을 마치고 곧장 버스를 타고 제 자취방 앞에 나타나신 날이 있었습니다. 양손에 김치통과 밑반찬 봉지를 한가득 들고서요. 저는 그날 어머니를 반기기는커녕 동기들 앞에 들킨 제 '초라한 밑바닥'이 부끄러워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습니다. 영화 결백을 보고 나서야, 그 기억이 이렇게까지 오래 저를 괴롭히는 이유를 알았습니다.고향을 지운 사람들, 추인회와 정인의 닮은 꼴영화 결백은 대한민국 최고 로펌의 에이스 변호사 정인이 치매에 걸린 어머니의 살인 혐의를 벗기기 위해 시골 고향으로 내려가는 이야기입니다. 제가 처음 이 영화를 봤을 때 눈에 들어온 건 법정 장면보다 정인이 고향을 대하는 태도였습니다. 폭력적인 아버지, 무기력해 보이는 어머니, 자폐를 가진 동생. 그녀는 그 전부를 ..
아버지의 차 키를 억지로 빼앗으려다 서로 등을 돌린 날, 저는 한동안 그 장면이 머릿속에서 지워지지 않았습니다. 그러다 우연히 1989년 아카데미 작품상 수상작 드라이빙 미스 데이지를 다시 꺼내 봤고, 영화가 끝날 즈음엔 후회와 반성이 뒤섞인 감정으로 한참을 멍하니 앉아 있었습니다. 늙어가는 부모를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 이 영화가 너무 조용하고 정확하게 짚어냈기 때문입니다.차 키 한 장이 건드린 존엄의 문제1948년 미국 조지아주, 70대 유대인 할머니 데이지는 후진 도중 이웃 마당을 들이받는 사고를 냅니다. 아들 불리는 어머니의 안전을 위해 흑인 운전기사 호크를 고용하지만, 데이지는 처음부터 그를 투명 인간 취급하거나 도둑으로 의심합니다. 처음 이 장면을 볼 때는 "저 할머니 참 까탈스럽다"는 생각이..
존 카니 감독이 만든 영화 중 부모와 자녀의 관계를 이토록 솔직하게 건드린 작품은 없었습니다. 저는 이 영화를 보다가 몇 달 전 베란다 창고에서 먼지 쌓인 통기타를 꺼내 들었던 날이 떠올라 혼자 픽 웃고 말았습니다. 엉망진창인 삶에서 음악이 어떻게 사람을 살려내는지, 그리고 부모가 아이에게 진짜로 다가가는 법이 무엇인지를 이 영화는 꽤 유쾌하게 증명합니다.낡은 기타 한 자루와 세대 공감플로라는 아들 맥스와의 관계를 회복하고 싶어 쓰레기통에서 망가진 어쿠스틱 기타를 줍습니다. 아들은 코웃음을 쳤고, 결국 플로라 자신이 온라인 기타 레슨을 받기 시작합니다. 여기서 주목할 점은, 플로라가 택한 방식이 '비싼 해결책'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학원비나 고가 장비가 아닌, 서툰 손가락으로 코드를 짚어가는 그 '어설픈..
솔직히 이 영화를 처음 접했을 때, 저는 그냥 잘 만든 일본 감성 영화 정도로 생각했습니다. 말기 환자와 의사의 로드트립, 예상 가능한 감동 코드. 그런데 보고 나서 며칠째 머릿속에서 떠나질 않았습니다. 죽음을 앞둔 사람의 이야기가 아니라, 죽은 것처럼 살아가던 사람의 이야기였기 때문입니다.완화케어 의사와 시한부 환자, 두 사람의 여행이 시작된 이유영화의 중심에는 완화케어(Palliative Care) 의사 사쿠라와 그의 환자 나루새가 있습니다. 완화케어란 생명을 위협하는 질환을 가진 환자와 그 가족의 통증·심리·사회적 고통을 통합적으로 관리하여 삶의 질을 높이는 전문 의료 분야를 말합니다. 단순히 수명을 늘리는 것이 아니라, 남은 시간을 어떻게 채울 것인지를 다루는 영역입니다.나루새는 왕년의 베스트셀러..
위기가 닥쳤을 때, 당신 주변에는 어떤 사람이 있었습니까? 화려한 언변으로 브리핑하는 사람이었습니까, 아니면 말없이 진흙탕 속으로 먼저 뛰어드는 사람이었습니까. 저는 직장 생활을 하며 그 차이를 뼈저리게 경험했고, 그래서 영화 서틴 라이브스(Thirteen Lives)를 보는 내내 가슴이 서늘하게 무너졌습니다.전문성: 훈련된 사람만이 들어갈 수 있는 곳이 있습니다2018년 태국 치앙라이, 탐 루앙 동굴(Tham Luang Cave)에 유소년 축구팀 13명이 갇혔습니다. 탐 루앙 동굴은 총길이 10킬로미터가 넘는 복잡한 수중 동굴 구조로, 우기에는 순식간에 물이 차오르는 곳입니다. 태국 해군 특수부대조차 진입을 포기한 이 동굴 안으로, 영국의 베테랑 케이브 다이버(Cave Diver)들이 자비를 들여 날아..
퇴근 후 현관문 앞에서 숨을 고르며 표정을 고쳐 잡아본 적, 한 번쯤 있지 않으신가요? 저는 그 버릇이 생긴 지 꽤 됐습니다. 영화 한 편을 보다가 그 장면이 떠올라 피식 웃었다가, 금세 콧잔등이 시큰해졌습니다. 캐나다 뉴펀들랜드의 작은 항구 마을 티클 헤드를 배경으로 한 휴먼 코미디 그랜드 시덕션 이야기입니다.어업 쇠퇴와 보조금 의존, 마을이 잃어버린 것어업이 지역 경제의 중심 산업이었던 시절, 티클 헤드 주민들은 바다에서 물고기를 건져 올리며 가족을 먹여 살렸습니다. 그런데 어획량 감소와 산업 쇠퇴가 겹치면서 마을 대부분의 주민은 실업 상태에 놓이고, 정부가 지급하는 복지 수표에 기대어 하루하루를 버텨내는 처지가 됩니다.여기서 복지 수표(welfare cheque)란 정부가 실업자나 저소득 가구에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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